이것은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자들의 서사다
스물일곱, 맥베스를 연출하던 남자는 암 판정을 받고 맥베스처럼 쓰러진다. 대장의 끄트머리 직장에 7.5센티미터의 암 덩어리가 틈입했다. 처음엔 몸속으로, 그다음엔 삶으로 틈입하여 무도한 권력을 휘둘렀다. 암의 나라로 추방된 자는 생生의 명命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강인한 생존자가 되고 싶었던 남자는, 암의 회복 불가능성을 직면하며 고통의 공동체를 살아낸다. 처절하게, 처연하게, 무모하게, 담담하게.
붉게 아름답던 노을이 인상 깊던 그날, 하루치의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저녁, 여자는 남자의 암 소식을 들었다. 데면데면한 사이였고, 독한 연애가 휘몰아치고 지나간 직후였으므로, 여자는 기껏 우정을 가늠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애의 서막은 거짓말처럼, 가을의 주술처럼 펼쳐졌다. 영화 〈도쿄타워〉를 보며 통곡하던 남자, 항암치료로 앙상해진 날개 꺾인 새의 날갯죽지 같던 그의 어깨를, 여자는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들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남자가 암 판정을 받은 이후 그들은 연애를 결심했고, 암 수술 이후 지독한 투병의 과정 속에서 그들은 결혼을 결행한다. 곧 십 년의 세월에 다다를 것이다. 이것은 기적처럼 치유된 암 생존자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죽음보다 강한 사랑 이야기인가. 둘 다인가. 어쩌면 둘 다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이것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며 한 여자의 이야기다.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이들의 서사다. 그것은 사랑의 끈질긴 요구다.
사랑은 운명처럼 시작된다는 말은 진실이다. 왜냐면 삶 자체가 운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리하여 사랑은 패배하지 않는다.
윤호의 이야기: 암에는 완치가 없다
이 책은 스물일곱 살에 직장암 판정을 받은 윤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윤호는 암 판정을 받고 급히 수술해야 할 병원을 찾는 과정, 수술 전후의 상황을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수술 이후의 시간들은 더욱 고됐다. ‘암이 아니라 암치료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스물네 번의 방사선치료와 서른 번의 항암치료는, 그로 하여금 “젖 먹던 힘으로 살아날 각오를, 죽을힘으로 죽어갈 각오도 동시에” 하도록 했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말이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서도 정신만 차리면 살길이 열리리라는 희망을 강조한다. 윤호도 암치료를 받다가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드물지 않게 고통스러운 순간을 참고 견디는 데 진통제 같은 효과가 있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암 환자에게 ‘정신만 차리면’에 해당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구호를 따라서 ‘생존자 되기 프로젝트’로 수행된다. 그렇다면 ‘산다’는 어떨까? 옛말에는 ‘산다’ 이후가 없다. 과연 어떻게 산다는 것일까? 호랑이에게 물린 후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채 탈출한 사람의 인생은 해피앤딩이었을까?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암에 걸렸다가 암치료를 마치고 죽지 않게 된 암 환자는 그 이후에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암에는 완치가 없다. 의학적 완치라는 개념은 단지 ‘5년’이 기준이다. 암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으며, 재발된 암은 치료도 어렵고 전망은 더 어둡다. 그러므로 암은 진정한 완화를 확인할 뿐이지 영구적 완치를 확정할 수 없다. 윤호는 랜스 암스트롱처럼,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암을 극복해낸 성공 스토리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차츰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윤호가 항암치료를 마친 직후인 2008년 당시, 암 환자의 절반이 일 년 이내에 실직 상태에 놓여 있었다. 2014년의 조사에 의하면, 암 투병 중 절반 이상이 고용 상태가 변했으며 그중 80퍼센트가 실직했다. 암 생존자가 건강의 나라에 다시 진입하여 자리를 잡는 것은 무척 힘겨운 일이다. 윤호의 암 생존자-되기 프로젝트는 번번이 좌초했고 매번 좌절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주은과의 사랑이었다.
“주은은 내가 끈덕지게 붙들었던 나 자신과 세계와 미래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들을 줄기차게 파괴했다. 그녀는 암 생존자-되기 프로젝트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고 서두르는 나를 말리거나 마지못해 내버려두었다. 그녀와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된다는 것은, 내가 계속해서 살아오고 사랑했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사랑은 필연적으로 나를 실패에 이르게 만들었다. 나는 암 생존자-되기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했다.”(본문 중에서)
윤호가 스스로를 실패했다고 말하는 그 지점에서 오히려 구원이 열렸다. 주은은 그를 벌하지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다. 그로부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새로운 경이의 시간이 열렸다. 그들은 혼인의 서약을 하고 미래라는 무한히 새로운 시간을 기적처럼 맞이했다.
주은의 이야기: 우리는 모두 결여의 사람들
독자 모니터단으로 참여했던 한 독자는 이렇게 평했다. “전반부는 윤호가, 후반부는 주은의 서사가 나를 사로잡았다.” 라깡에 의하면, 사랑은 자신의 결여를 타자에게 주고 타자에게도 그의 결여를 증여해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윤호의 치명적인 결여가 스물일곱 살에 시작되었다면, 주은의 결여의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다. 그것은 사랑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세상이자 생애 첫사랑으로 만나는 엄마”와의 인연, 혹은 그 유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윤호와 주은은 서로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결여의 사람들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하였고 연대하였고 공동체를 이뤘다.
“윤호와 나 사이에는 공통분모로서 정상성의 결여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존재가 세계를 향해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것이 들렸을 수도 있다. 그의 소리를 들었으나 모른 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대받지 못한 삶을 살았던 나는, 나의 결여-환대를 그에게 주고, 건강하지 않은 그로부터 그의 결여-삶을 약속받고 싶어졌다.”(본문 중에서)
사랑과 사회의 재발명을 위하여
이 책은 두 저자 윤호와 주은의 서사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대개 사랑의 서사는 사소한 우연이 특별한 인연으로 발견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하여 그것이 모종의 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며, 노력의 차원이 아닌, 새로운 가치의 발견이 요구된다. 저자들은 이를 ‘사랑의 재발명’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되, 그는 그의 시선으로 나는 나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으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며,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은 삶을 재발명하는 것이 된다.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출발은 주체 자신에게 환원된, 기껏 단순한 만남 정도로 시작되지만, 사랑과 더불어 우리는 동일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차이에서 비롯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본문 중에서)
사랑의 시작에 비해, 사랑의 서사가 드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발견의 지점에서 어떤 굳건한 의미로 비약하기 위해서는, 때로 보편의 가치와 보편의 방식들을 거스르는 저항이 요구된다. 연애와 결혼마저 자본의 시장 속에서 가늠되는 ‘삼포세대’의 세상에서, 사랑은 그 구조 속에 함몰되지 않는 하나의 가능성을 추동한다. 사랑의 재발명은 사랑의 모험으로만 가능하며, 그것은 반드시 삶의 재발명을 추동하며, 사회의 재발명으로 나아간다.
“마치 사랑 앞에서 그토록 용감했던 줄리엣처럼, 주은이 용기를 낸 덕분에 나는 그녀와 함께 살아왔다. 무엇보다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욕망을 창안하고 새로운 사랑을 재발명하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고 그 결과가 신통한 것만도 아니었다. 위기도 있었고 갈등도 많았다. 하지만 사무엘 베케트의 말을 따라 그저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기를 거듭할 뿐이다. 다시 더 낫게 실패하는 한, 비록 승리하지는 못할지언정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