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지개를 타고
보배
2019-08-12
164
120*190 mm
979-11-85585-74-1 03810
13,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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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견 여성이자 퀴어인, 한국 사회에서 소수일 수밖에 없는 정체성을 가진 저자의 한없이 개인적인 고백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적인 그 고백을 따라 읽다 보면 어느새 나 역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세상에 고통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글을 쓰고 읽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고야 만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해본다. 이 책은 소수자들에게 한없이 가혹한 ‘연민과 혐오의 세계’를 넘어, 사랑과 연대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어줄 마법 같은 책이라고.”

_ 박상영(소설가)

 

전지적 퀴어 시점!
우리는 모든 걸 퀴어하게 읽을 수 있다

성소수자 인권 신장에 문학으로의 접근을 택한 단체가 있다. 국내외 퀴어문학 작품을 아카이빙하고 리뷰하는 활동을 중심으로 퀴어 작가를 위한 창작강좌 운영, ‘퀴어문학상’ 시상, 소설창작모임을 통한 작품집 출간, 퀴어문화축제 참여 등 퀴어문학을 알리고 퀴어 작가들의 창작을 독려하기 위해 열띤 활동을 이어가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의 기금으로 2015년 창립해 올해로 5년째, 퀴어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 비영리단체를 만든 사람은 자칭 ‘퀴어문학 마니아’ 보배다.
퀴어 당사자이자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로, 그저 읽고 싶고 알고 싶어서 퀴어문학 정보를 찾고 모으던 대학생 시절의 취미를 계기로 비영리단체까지 만든 보배는 웬만한 이야기는 다 ‘퀴어하게’ 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전지적 퀴어 시점’을 취하면 어떤 작품이든 ‘퀴어하게’ 읽을 여지가 있다는 것. 구전문학부터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까지, 동화부터 청소년소설, BL 만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는 전지적 퀴어 시점의 책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국에서 퀴어, 여성으로 살며
삶으로 읽어낸 이야기들

‘퀴어문학’, ‘퀴어’라는 말은 더 이상 별세계의 무엇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저자는 자주 분노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존재가 너무 오랫동안 지워져 있다고 느꼈다. ‘없어도 너무 없다’고 푸념할 만큼 퀴어 인물이 등장하는 문학은 적었고, 그나마도 너무 어둡고 우울하게 묘사되어 있거나 이야기의 반전, 일종의 ‘충격’을 위한 ‘소재’로 소비되는 것에 분노했다. ‘퀴어문학’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에 지식백과와 해외 사이트를 뒤져서 정리한 200여 편의 작품을 기반으로, 출판사도 서점도 도서관도 아닌 이상한 단체를 만든 건 분노가 주요 동력이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문학을 비롯한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이야기들에서 묘사하는 퀴어의 삶은 마치 깨진 거울의 파편이 널려 있는 방과도 같다. “한 발자국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겨우 용기를 내더라도 크게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삶. 상처, 고통, 자기혐오를 안고 거울을 증오하는 삶.” 하지만 저자는 한국에서 퀴어 여성으로 살며 직접 경험하는 일상이 깨진 거울의 파편이 널린 방보다는 과속방지턱이 많은 도로에 가깝다고 말한다. 세상의 규칙과 자신의 속도에 맞춰 원하는 곳을 향해 차를 운전하지만 자꾸만 속도를 줄여야 하고, 간혹 제때 속도를 줄이지 못하면 머리를 찧기도 하는, “고통이라기보다는 불편함.” 저자는 성소수자로서 자신의 삶을 그렇게 인식한다.
“너도 혹시, 뭐, 성소수자 그런 거냐?” 어머니는 대뜸 묻지만 대답할 틈은 주지 않은 채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돌리고, 동성 애인과 커플 잠옷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본 친구는 “보배가 하늘색이네?” 하며 누가 ‘남자 역할’인지를 묻고, 수많은 문학 속 퀴어 인물들은 자꾸만 자신의 존재를 사과하며 호소하고, 퀴어문화축제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혐오세력은 높다란 피켓에 버젓이 언어폭력을 전시하며 ‘동성애는 죄악’을 외친다. 시스젠더-이성애-유성애-일대일 성애 관계가 ‘당연함’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그중 어느 하나라도 벗어나 있는 사람이 받는 일상적이고 폭력적인 요구는 ‘당연함’의 자장 안으로 들어오거나, 아예 바깥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눈에는 띄지 않도록’ 숨어서 살라는 것이다.
이 같은 현실은 문학에 투영되고, 저자는 다시 삶으로 그것을 읽어낸다. 가령, 성소수자인 딸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를 이야기하는 저자의 방식은 “이미 산 중턱에서 태어난 셈”인 성소수자에게 가파른 산일 수밖에 없는 가족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그럼에도 사회가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입구로써 가족의 가능성을 엿보는 식이다. “책은 구원이 되어주지는 못했지만, 내 등을 도닥여는 주었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책을 매개로 누군가의 등을 도닥일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내쫓기지 않았으며
도망가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일주일 중 적게는 10시간, 많게는 60시간까지 무지개책갈피 활동에 쏟아붓는 저자가 생각하는 활동가란 무엇일까. 그가 생각하는 활동가란 ‘노동 시간=황금’이라는 등가성을 거부하는 일, 황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을 ‘그래도 조금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일이다. 연대의 방법까진 모른다고 하더라도, 나 하나의 행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우리 사회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슬프고 외롭고 화가 나서, “고통을 우회하기 위해서” 책을 읽은 사람이 과연 저자뿐일까. “동성애가 좋으면 집에서 해라, 내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된다”라고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인권 신장이 과연 ‘나중에’ 가서라면, 시간만 좀 흐른다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일까. 편견과 혐오 때문에 오히려 광장으로 나서게 되는 사람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가 오랫동안 지워져왔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찾아 읽거나 쓰는 사람이 없다면, 다시 그 이야기에 감응하고 그 감응을 주변에 나누는 사람이 없다면, 그러니까 느슨하게라도 연결되지 않아서 결코 스칠 수 없다면 말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혐오와 편견 때문에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므로 ‘전지적 퀴어 시점’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든지 자유롭고 퀴어하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 읽어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그러다 종종 타인이 느끼는 고통의 곁에 설 수 있다면, 연대는 도무지 알 수 없더라도 어디선가 살아내고 있을 또 다른 누군가를 상상하며 버틸 수 있다면, ‘나중에’는 그렇게, 자기 소멸을 희망하며 지금을 움직이려 애를 쓰는 사람들 때문에 도래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무지개를 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