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자들] 저자 주승현 박사 경향신문 인터뷰
- 2018-10-30
[커버스토리]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씨 "한국은 섬나라···통일 땐 국민들 사고지평 넓어질 걸요”
‘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씨
한국인 다수는 ‘분단’에 내성이 생겼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도, 대북제재 때문에 북한주민이 굶주린다는 뉴스를 보아도, 내 일이라고는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엔 분단을 몸과 마음 깊은 곳까지 느끼는 3만여명의 사람들이 있다.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탈북민들이다. 고난의 행군 시절 배고픔을 못 이겨 온 사람도 있고, 자유와 기회를 열망하며 온 사람도 있다. 그러나 탈북민은 남한에서도 ‘비국민’ 취급을 받는다. 이들에겐 남한 주민들을 향한 ‘감사한 태도’만이 용납된다. 천대와 멸시 속에 비참한 죽음을 맞은 이들, 제3국으로 떠난 이들도 있다. 분단 체제는 탈북민에 대한 폭력적 시선의 근원이다.
탈북민들은 남과 북을 모두 겪으며 생이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탈북민들은 ‘먼저 온 통일’이자, ‘분단의 증언자’다. 탈북민들 대다수가 극우보수일 것이라는 통념은 정치권이 만들어낸 ‘착시’다. 한국사회는 진영논리에 따라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취사선택했다.
2000년대 초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주승현씨(38·사진)는 탈북민 최초의 통일학 박사다. 그가 올해 초 펴낸 책 제목은 <조난자들>이었다. 남북의 격차, 격동하는 세계정세가 만들어낸 파도 위에서 주씨와 탈북민들은 마음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한 채 떠돌았다. 주씨는 분단 극복을 인생의 과제로 생각한다. 남에 내려와 죽기 살기로 공부한 것도 이 과제를 위해서였다. 주승현씨가 전하는 ‘현재진행형’의 분단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인생, 그의 감각, 그의 생각을 프리즘 삼아 지금 한반도가 맞은 해빙기를 바라본다.
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승현씨가 말하는 ‘경계인의 삶’
소년은 골목대장이었다. 일곱살에 친구들을 꾀어 집에서 네시간 거리의 대도시 구경을 나갔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주변 학교 패거리들과 치고받다가, 화해하면 ‘의형제’를 맺었다. 공부는 못했지만 소년을 아껴주는 선생님들도 많았다. 열일곱 무렵에는 선생님이 술을 가르쳤다. 술자리에서 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말고 너의 믿음을 믿어라’와 같은 말은 지금도 그의 가슴에 남아있다.
북한의 심리전 방송요원으로 근무하던 23살, 그는 비무장지대에 촘촘히 박힌 지뢰와 고압전선을 피해 경계를 넘었다. 이후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극도로 조심스러운 사람이 됐다. 처음 취직했을 때 그는 남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했지만, 더 적은 월급을 받았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은 자신의 ‘출신’을 숨기려 노력했다. 그 역시 자신의 말투를 접한 상대의 묘한 표정이 견디기 힘들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발음 연습을 하던 날, 설움이 북받쳐올라 눈물을 쏟았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출전(2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판문점선언(4월27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북·미정상회담(6월12일), 지난달 19일의 평양공동선언…. 2017년 떠돌던 전쟁위기설이 무색할 정도로 한반도는 해빙무드가 완연하다. 주승현 박사를 지난 23일 경기도 오산 한신대학교에서 만났다. 그는 현재 인천대학교 동북아국제통상학부 초빙교수(통일 통합연구원 상임연구위원)로 재직 중이다.
■ 남한에 온 후 잉여인간이 되었다
약속시간 10분 전에 약속장소인 대학 강의실을 찾았다. 그는 홀로 앉아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모두 빠져나간 뒤였다. 언젠가 한 교수가 기자에게 ‘상식’이라는 듯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탈북민들의 시간관념은 엉망이다.’
“저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제가 군 출신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30분~1시간씩 일찍 약속장소에 가 있는 것이 습관이 됐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이곳에서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시켜왔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는 한국에 온 후 10년 만에 박사모를 썼다. 시험기간에는 1주일에서 열흘 내리 도서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누워서 자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그랬다고 한다. 대학 등록금을 위해 전단지 알바, 호프집 종업원, 건설현장 일용직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도 휴학 한번 하지 않았다.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 같은 것 때문이었어요. 학업을 선택했는데 이걸 포기하면 다른 것은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어요. 두려움도 컸어요. 중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요.”
인간 주승현의 23살 이후의 삶은 “혹독하게 시리고 궁핍했다”. 외로움에 사무치던 초창기, 가족처럼 도와주던 동료 탈북민은 주승현의 정착금을 가져간 후 연락을 끊었다. 남한 사람들은 그에게 엉터리 휴대전화와 물건을 팔며 돈을 뜯어갔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주유소 아르바이트 자리도 힘들었다. 북한에서도 굶지 않았던 그는 남한에서 처음 굶어봤다. 군에서 배운 독도법으로 지리를 익혀 동네를 돌아다녀야 했다. 일식당에 처음 취직했을 땐 고된 일을 마다 않고 남들보다 하루 네시간씩 더 일했는데 월급은 50만원 적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취직은 순탄치 않았다. 서류전형에서만 100번 가까이 떨어졌다. 지원서에 ‘탈북민’의 흔적을 지우니 서류전형 합격 통보가 줄줄이 날아들어 착잡해진 적도 있다. 곡절 끝에 취직을 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한 뒤 석·박사과정을 밟으려고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분단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탈북자’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분단·통일을 연구하기로 다짐한 자신과의 약속을 끝내 지켜 박사학위까지 따냈다.
한국인들은 잔인할 정도로 ‘사회 부적응자’를 금세 알아챈다. 눈빛, 말투, 걸음걸이, 행색 어느 것 하나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자신들과 섞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박정범 영화감독은 <무산일기>에서 자신의 친구였던 한 탈북민을 직접 연기했다. 질식할 것 같은 표정, 움츠러든 어깨, 어색한 걸음걸이, 허름한 행색, 답답할 정도로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고 견디는 태도를 연기했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3만2000여명에 이른다. 한때 주승현씨 역시, 아니 어느 탈북민이라도 <무산일기>의 주인공처럼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초조한 표정으로 당신의 곁을 지나갔을지 모른다.
<조난자들>에는 ‘조난’ 끝에 끝내 세상에서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북한의 일류대 김책공업대학을 졸업한 한 탈북민은 한국에 와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취업에 번번이 실패했다. 배우자마저 그를 떠났다. 그는 임대아파트 화장실에서 목을 맸다. 북한에서 의사였던 한 탈북민은 아내의 치료를 위해 한국에 왔고 공사장 일용직 등을 전전하며 치료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2016년 그는 빌딩 유리창을 닦다가 13m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그가 숨진 후 발견된 일기장엔 “편법이 용납되는 결과주의와 일등주의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 왔던 많은 탈북민들이 “배고픔보다 더 고통스러운 천대”에 외국으로 떠나가기도 한다. 차별에 대해 얘기할라치면 ‘북으로 돌아가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직장에선 ‘김정은에게 그렇게 배웠냐’는 이상한 조롱도 견뎌야 한다. 때로 우리는 그들을 일컬어 ‘먼저 온 통일’이라고 부른다. 주 박사는 ‘이런 통일이 우리의 미래이기를 바라느냐’고 묻는다.
“준비없이 통일을 하다간 끝없이 비용만 들어가고, 갈등하고 적대하고, 심지어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학부 전공수업 때 ‘민주주의는 일방적 동화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독일 통일 사례를 얘기하죠. 그런데 그 통일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을 선택한 통일’이에요. 서독이 동독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 과정이 있었죠. 서독에선 ‘탈동독민도 서독의 국민’이라는 포용력과 성숙함이 있었어요. 우리는 독일 사례를 말하면서도 독일을 공부하지 않아요. 탈북민과 소통하려 하지 않고, 북한주민을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