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자들] 한겨레 이진순의 열림_저자 심층 인터뷰
- 2018-05-30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탈북자 최초 ‘통일학 박사’ 주승현
“시끄럽지 않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잠이 안 오거나 뭔가 힘든 일이 생기면 무작정 차를 몰고 여기 왔죠.” 서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대남방송 요원으로 일하다 군사분계선을 뛰어넘어 남쪽으로 탈출한 주승현 전주기전대 교수는 남북 양쪽의 확성기 소리가 요란한 임진각 근처를 200번 넘게 찾아왔다고 말했다. 주 교수가 지난달 20일 임진각 너머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통일’은 빛바랜 깃발이다. 천만 이산가족 중에 생존자는 이제 6만1천여명뿐, 재회의 날을 손꼽으며 눈물 찍어내는 노인들의 모습을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누구나 통일을 이야기하지만 누구도 통일을 보여주지 못했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공식회담의 물꼬를 튼 박정희 정권이 ‘평화통일 의지를 담아’ 내놓은 것은 유신헌법이었고, 통일 대비 기금을 모으자던 이명박 정부의 ‘통일항아리’는 일찌감치 ‘밑 빠진 독’이 되어버렸으며, ‘통일 대박’을 외치던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남북교류의 문을 닫아걸었다. 많은 경우 통일은 포장지만 그럴듯한 ‘짝퉁’이거나 당첨번호 없는 로또 뭉치에 불과했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과 소녀시대 서현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부를 때 방송카메라는 뜨겁게 눈시울을 붉히는 중장년층 관객을 연신 비췄지만, 그 공감대는 세대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날의 공연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었지만, 그 감흥은 이전 세대와 같이 ‘민족의 염원’에 대한 가슴 뭉클한 격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통일은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이고, 당장의 생존은 엄중하고 긴급한 현실이다. 대한민국 청년들에게는 일상이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다.
“통일은 한때는 숙명이었고 한때는 금기였으며 한때는 열망이었다. 지금은 숙명도 금기도 열망도 아닌 헛헛한 유물처럼 치부되는 상처 입은 통일을 바라보며, 비로소 난 정색하며 묻고 싶었다. 우리의 소원이 정말 통일인가, 라고.”(주승현 저, <조난자들> 108~109쪽)
주승현(37)은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에 정착한 청년이다. 새로운 이산가족 세대인 그에게 분단은 잔인한 현재형이고,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 역시 절박한 현재형이다. 출신성분과 계급성이 인생을 좌우하는 북한을 탈출해 넘어왔지만, 그를 맞이한 건 수저 색깔에 따라 미래가 규정되는 냉혹한 남한 현실이었다. 주승현처럼 남북한을 모두 경험한 청년들에게 대한민국의 민낯은 어떤 모습일까? 탈북민이 3만명을 넘어선 시대, 우리는 그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분단의 상처를 문신처럼 품고 사는 탈북 청년들에게 진정한 통일이란 어떤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