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독식 사회] '착한 부자' 주도 해법, 민주주의 담보 못한다/ 김공회
- 2019-08-07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두툼한 암체어에 앉아 지폐에 불을 붙여 쿠바산 시가를 피우는 대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앳된 표정의 부자들이 여기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평범한 사람들과 공동주택에 살기도 한다. 이들은 수십억달러를 쾌척해 교육, 빈곤, 질병 같은 세상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선다. 미디어는 이들의 미담을 전하고 대중은 환호한다. 바야흐로 ‘착한’ 부자들의 시대다.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미국 시민운동의 상징인 랠프 네이더는 선언했다. 세계적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착한 부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오늘의 경제를 ‘박애 자본주의’라고 명명했다. 국가도 노조도 대부분의 평범한 삶들을 온전히 돌보지 못하는 오늘, 저 선의로 가득 찬 부자들이 해결사가 될 것인가?
오늘의 신흥 부자들이 각별해 보이는 것은 그들이 유능한데다 선하다는 이미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한 이들은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은 전통적인 부자와 다르고, 저마다 동네 차고에서 출발해 단기간에 대기업을 일궈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조직보다도 유능하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기술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한다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돈을 벌었다. 누구는 아이디어를 내고, 누구는 기술을 개발하며, 누구는 그 실현에 필요한 자금을 댄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만나 친구가 될 수 있는 웹사이트, 온라인에 있는 모든 것을 검색할 수 있는 웹사이트가 그 자체로는 누구에게도 해로울 수 없으리라.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 그리고 ‘옳은 일을 하자’(do the right thing). 이런 그들이 쌓은 막대한 부를 풀기 어려운 사회문제 해결에 쓴다? 기대되는 일이 아닌가?
이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는 몇가지가 고찰돼야 한다. 먼저 요즘 슈퍼리치들이 손대고 있는 문제들은 30~40년 전만 해도 거의 전적으로 정부의 업무로 여겨졌을 것들이라는 점이다. 100년 전만 해도 부자들의 자선은 사회문제 해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게 사실이다. 근대적 사회보장제도 확립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했던 영국에서조차 1911년까지도 빈민법에 의거해 정부가 지출한 액수에 비해 등록된 자선단체가 더 많은 기여를 했을 정도다.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빈곤, 교육, 질병, 공중보건, 노인부양 등이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적어도 서구 선진국에서 이런 문제들은 대체로 정부가 담당하게 되었고, 후발국들도 그런 경로를 부족한 대로 좇았다. 저항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 결과 시차가 있기는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많은 나라에서 정부의 역할은 축소됐다. 1990년대 이후 부자들의 자선이 강조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런 공백 때문이다.
둘째, 그런 맥락에서 슈퍼리치들의 자선이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을 파고드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지적돼야 한다. 부자의 자선은 정부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축소시키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기제로 꼽히는 게 조세다. 부자들이 단순히 자신의 사재를 털어 선행을 하는 게 아니다. 보통 비영리법인을 만들어 거기 투자하는 방식이 이용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상당액의 세금을 아낄 수 있다. 적어도 그들은 이렇게 아낀 세액만큼 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바로 그 영역에서, 국가와 슈퍼리치의 재단 중 누가 더 일을 잘할 것인가?
셋째, 위 질문의 답은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어떻게 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례로 한 재단이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서 농업생산력을 높이고자 좋은 종자를 보급했고, 그 결과 생산력이 실제 높아졌다고 하자. 이것은 성공일까? 만약 그 결과 많은 농민이 한꺼번에 농지에서 이탈됐다면 어떨까? 분명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라면 후자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지만, 민간 재단으로서는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이런 문제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공적 성격이 전혀 없는 재벌 3세나 연예인 자산가들이 사회혁신이나 지역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도심 변두리를 ‘보기 좋게’ 탈바꿈시키는 과정에서 기존 거주민들이 바깥으로 밀려나는 게 그 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혁신일까?
궁극적으로 특정 부자가 주도하는 사회문제 해결 프로젝트는 민주주의의 결여라는 문제를 극복하기 어렵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일개 민간단체에서 담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문제에는 권력과 이해관계 갈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의제의 선정에서부터 접근법·해결책·사후책임범위의 결정과 관련된 모든 것이 민주주의의 문제다. 왜 하필 말라리아인가? (회장님이 우연히 관련 글을 읽었다.) 왜 하필 교육인가? (우리의 사학을 떠올려보라.) 왜 하필 자연사박물관이고, 왜 하필 그것을 저 지역이 아닌 이 지역에 세우나? 슈퍼리치의 재단은 이런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부자들의 자선을 억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역할의 성격과 범위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어떤 합의를 만들어나갈 것이냐가 중요하다. 이를테면 자선인가, 조세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복지국가의 재편과 관련된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에 대한 논의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또한 승자 독식의 현재의 경제구조를 영속적으로 볼 이유도 없다. 그것이 좀 더 평등한 방향으로 바로잡히면, 소수 부자들의 자선 행위가 지금 같은 관심도 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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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4614.html#csidx8b352029716fe879b085c492e72cd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