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목숨을 걸고 타인을 지키는 선함을 가능케 하는가?
폭력과 전쟁의 와중에 평화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1939년에서 1945년까지, 프랑스 중남부 비바레리뇽 고원 주민들은 나치 점령으로 인해 쫓겨온 수많은 난민을 수용했다. 덕분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치에게 끌려갔고 목숨을 잃었다. 그 어떻게 한 공동체 전체가 합심하여 커다란 위협을 무릅쓰고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있을까? 인류학자인 저자는 그곳으로 떠나 ‘평화’를 연구하기로 한다.
비바레리뇽 고원의 과거를 더듬고 현재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난민 어린이를 위한 보호소 ‘레 그리용’을 관리하던 다니엘 트로크메라는 인물이 저자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고원에 도착한 망명 신청자들을 만남과 동시에 다니엘의 행적을 추적해나간다. 다니엘은 레 그리용의 아이들을 열렬히 사랑했고,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게 된 최후까지 아이들에게 신의와 사랑을 보여주고자 애썼다.
이 책은 선함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인류학 연구서이자, 홀로코스트에 관한 역사서이자, 다니엘 트로크메에 관한 회고록이자, 저자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이다. 폭력적인 역사와 기억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책은 그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흔들림을 온전히 담아냈다. 이 섬세한 책을 통해, 독자들 역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존재가 얼마나 놀라운 가능성이 될 수 있는지 깨닫기를 바란다.
목숨을 걸고 타인을 지킨 평화의 공동체,
비바리레뇽 고원을 찾아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매일같이 참혹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멀리 있는 우리는 전쟁의 실상에 몸을 움츠릴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의 선함이라는 가치는 연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고, 그것을 제일 가치로 두고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러시아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인류학자로서 머물던 저자 역시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집단 기억’을 연구하던 저자는 각종 폭력을 겪은 사람들의 끔찍한 기억을 파헤치다가, 결국 자신이 “툭 부러졌다”고 느낀다. 러시아·체첸 전쟁으로 외국인 연구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결국 러시아를 떠나게 된 저자는 이제 ‘평화’를 연구해보기로 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찾던 그의 앞에 나타난 보물 같은 곳이 바로 프랑스 중남부의 작은 고원 비바레리뇽이다.
1939년에서 1945년까지, 비바레리뇽 주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나치 점령으로 인해 쫓겨온 수많은 난민을 수용했다. 구조 활동에 참여한 이들은 농부, 상인, 성직자, 교사, 정치인 등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행한 일은 가벼운 친절이 아니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었으며, 실제로 일부 주민은 처벌받거나 목숨을 잃었다. 비바레리뇽 고원은 지금도 망명 신청자들을 보호하며 거처를 제공하고 있다. 어떻게 한 공동체 전체가 합심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곳으로 떠나 인류학자로서 평화를 연구하기로 한다.
이 책은 저자가 고원 주민들과 그곳에서 지내는 망명 신청자들을 만나 대화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남긴 기록이다. 이방인을 보호해주는 고원 주민들의 모습을 통해, 저자는 선한 바탕 위에서 이방인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조건 없이 타인을 환대하고 보호한 고원이 품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폭력과 혐오에 관한 이야기가 공기 중을 가득 채운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타인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법을 비로소 배우게 될 것이다.
생을 구원하고 이끄는 사랑의 힘
다니엘 트로크메와 '작은 귀뚜라미들'
비바레리뇽 고원의 과거를 더듬고 현재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다니엘 트로크메라는 인물이 저자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다니엘은 비바레리뇽 고원에서 난민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보호소 레 그리용과 메종 드 로슈의 관리자를 맡았던 이로, 저자의 의붓 증조할머니의 남동생이기도 하다.
뿌리가 탄탄한 귀족 가문인 트로크메가에서 태어난 다니엘은 꿈 많은 청년이었고, 여러 선택지 중 원하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프랑스 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1930년대, 그는 안락한 국가와 계급, 직업에서 벗어나 떠돌기 시작했다.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과 교류하고, 어떤 사상을 좇아 살지 열정적으로 고민했으며, 서구 문명을 비롯한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여러 방황을 거쳐 결국 그가 다다른 곳은 비바레리뇽 고원이었다. 난민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수용하는 ‘레 그리용’(귀뚜라미들이라는 뜻)의 관리자를 맡기로 한 것이다. 다니엘은 보온용 물주머니를 어디서 구할지, 따뜻한 수프를 어떻게 산자락까지 옮길지 등 귀한 신분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까지 맡게 되지만 기쁘게 받아들인다. 다니엘은 아이들 하나하나와 깊은 사랑에 빠지고, 아이들의 얼굴은 다니엘에게 특별한 의미가 된다.
학생들을 보호하다가 결국 끌려간 수용소에서도 다니엘은 레 그리용에 있는 ‘귀뚜라미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보호하려 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사랑을 전한다. 다니엘에게 이 아이들은 어린 왕자에게 자기 행성의 장미와도 같은 존재였다. 꽃 한 송이를 사랑하게 되면 수백만 개의 별에서 그 꽃 한 송이만 피어나도 그 별들을 바라보며 행복해진다. 수용소에서 어려운 나날을 겪던 다니엘에게도 아이들의 얼굴만이 하늘을 환하게 비추었을 것이다.
저자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역시 프랑스 난민이었다는 사실, 생텍쥐페리가 홀로코스트로 고초를 겪고 있던 유대인 친구 레옹 베르트를 위로하려고 『어린 왕자』를 썼다는 사실을 짚으며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풍부하게 더한다. 어린 왕자가 비행기 조종사인 ‘나’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하고 위로를 구한 것처럼, 다니엘의 ‘귀뚜라미들’도 다니엘에게 수학을 가르쳐달라며, 책을 읽어달라며 그에게 도움과 위로를 구했다. 그러나 다니엘이야말로 그 아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으며, 이어지는 그의 삶은 아이들에 대한 신의와 사랑을 지키기 위한 여정이었다.
어린 왕자는 말했다. “꽃 한 송이를 사랑하게 된다면, 수백만 개의 별에서 그 꽃 한 송이만 피어나도 그 별들을 바라보며 행복해질 거야.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거야. ‘저기 어딘가에 나의 꽃이 있어….’ 하지만 양이 그 꽃을 먹어버린다면 그 순간 별들이 전부 빛을 잃을 거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일종의 미학적 휴식이나 기쁨을 줘서도, 우리를 고통에서 구해줘서도 아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하는 이유는, 밤에 고개를 들었을 때 한 별에 사는 그 아름다움이 밤하늘의 모든 별을 환하게 밝히기 때문이다. 한 얼굴의 아름다움이 모든 얼굴을 환하게 밝히기 때문이다.
─12장 <체렘샤의 노래> 중에서
다니엘의 이야기는 고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저자의 이야기와 병렬적으로 배치된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다니엘이 수용소에서 죽게 된다는 사실이 예견되지만, 그럼에도 다니엘의 마지막 행적은 가슴을 저미며 깊은 슬픔을 남긴다. 그것은 다니엘이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도, 귀한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결국 다니엘이라는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뚜라미들에 대한 사랑이 다니엘을 이끌었듯이, 우리도 결국 사랑으로 행동하게 되리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인류학자라는 모자를 내려놓고
구도자로서 겸허하게 나아가다
고원에 도착한 저자는 주민들에게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행한 선한 일을 듣고자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다’라며 그저 침묵한다. 벽을 맞닥뜨려 난감하던 차에, 저자는 고원에 ‘망명 신청자 환영 센터(CADA)’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는 과거부터 이어지는 고원의 구조 활동을 조사하려고 이 센터의 거주민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그들은 취약하고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고 끔찍한 폭력의 기억에 시달리지만, 자신들만의 기쁨을 간직한 채 일상을 살아간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푸드 뱅크에서 받아온 음식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 저자에게 대접하고, 서류 없이 불안정하게 지내는 상황에서도 어린이들은 열심히 자라난다. 프랑스에 와서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겪은 체첸인 여성은 좁고 불편한 공간에서도 깔개 하나를 펼쳐 자신의 신께 기도를 올린다. 저자는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이야말로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한다고 느낀다.
사실 저자는 유대인이자 바하이교인으로, 노련한 사회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고 있지만 신과 영혼을 믿는 사람이다. 모든 종교가 동등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성스러운 것’까지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가져온 에밀 뒤르켐의 혁명 이후, 저자가 경험한 바 사회과학계에서 연구자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유별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저자는 신앙을 드러내면서도 교묘히 숨겼다. 고원에 와서도 저자는 인류학자로서의 태도를 유지하고자 스스로를 다잡는다.
그런데 망명 신청자들을 바라보며 저자는 인류학자, 사회과학자로서의 태도를 조금씩 내려놓는다. 저자는 여전히 과학을 신뢰하지만, 과학의 어떤 부분이 믿기 어려운 이타심이나 희생, 고통을 견디는 힘을 납작하게 누른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또 과학으로는 진정으로 성스러운 것을 절대로 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고원에서의 시간은 탐구하고 파고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저 느끼며 함께하는 시간이 된다.
결국 저자가 이 연구를 어떻게 끝냈는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기로 하는지 등은 책의 말미에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저자는 고원과의 인연을 소중히 붙잡은 채 주민들과 함께 새로이 들어오는 난민들을 돕는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역시 사려 깊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현재 위치에서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닌지, 책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고원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저자의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역동적으로 변화한 결과, 이 책은 선함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인류학 연구서이자, 홀로코스트에 관한 역사서이자, 다니엘 트로크메에 관한 회고록이자, 저자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가 되었다. 폭력적인 역사와 기억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책은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흔들림을 온전히 담아냈다. 이 섬세한 책을 통해, 우리들 역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존재가 얼마나 놀라운 가능성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