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분노와 절망을 넘어 깊은 연대로의 회복을 꾀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왼쪽에 선다”는 것의 의미를 망각한 시대에 건네는 강렬하고도 도발적인 비평과 성찰을 담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이다. 이 시대 가장 중요한 목소리 중 하나이자 신중하고 원칙적인 좌파 사상가라 평가받는 도덕철학자 수전 니먼이 빼앗긴 ‘좌파’라는 단어를 되찾아 오기 위한 여정으로 독자를 이끈다.
이 책은 철학서이다.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모든 혼동과 뒤엉킴은 철학을 통해 풀어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치적 실천도 강화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태어났다. 지구 전역에 걸쳐 분노의 함성이 높아지고 있다. 파시즘의 모태라고 할 만한 세력들이 도처에서 발호하고 있다. 그러나 니먼은 절망으로 손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더 많은 희망을 열망할 의무가 있다고 목소리 높인다. 간결하면서도 논쟁적이고 정열적이면서도 냉철하게 빛나는 선언문이 우리를 찾는다.
좌파의 입장에 선다는 것에 관하여,
용감한 도덕철학자가 건네는 날 선 성찰
경계가 흐릿하다. 우리는 소위 ‘깨어 있으면(stay woke)’ 좌파라 생각하고, 좌파라면 ‘깨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러할까? 이 시대 가장 중요한 목소리 중 하나인 도덕철학자 수전 니먼은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오히려 “아주 중대하고 위험한 실수”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칭 좌파, 요컨대 “워크(woke)”라는 낯선 수식어를 단 이들과 본래의 좌파는 “아주 다르기”에 한데 묶여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좌파 진영과 언뜻 서 있는 입지가 겹쳐 있을 뿐, 애초 그들을 형성하고 실천으로 이끄는 지적 뿌리와 자원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여기, 분노와 절망을 넘어 깊은 연대로의 회복을 꾀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왼쪽에 선다”는 것의 의미를 망각한 시대에 건네는 강렬하고도 도발적인 비평과 성찰을 담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이다. 기실 많은 것들이 오른쪽으로 기우뚱 기울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러하고, 지구 전체가 그러하다. 이때야말로 좌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책 속 문장들은 강조한다. 요 몇 년 미국 사회는 “워크 논쟁”으로 뜨겁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에만 매달리느라, 다른 위험에 처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이 과정에서 좌파가 가졌던 사상과 정신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책은 말한다. 한국 사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은 피부로 감지했지만, 어디가 어떻게 그러하냐는 대목에서는 속 시원한 모색이 어려웠던 독자들에게 참으로 시기적절하게 도착한 저작물이다. 대단히 지성적인 동시에 열정과 희망이 흘러넘치는 이 시대 가장 날카롭게 빛나는 선언문이 뜨끔 아프면서도 갈증이 해소되는 맹렬한 읽기의 체험으로 독자를 이끈다.
보편주의, 진보, 정의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후 일생 대부분을 독일에서 보냈으며 포츠담에 있는 아인슈타인 포럼의 이사로 재직 중인 니먼은 오랜 시간 도덕철학, 계몽주의, 형이상학, 정치에 관한 글을 쓰며 철학이 현실 세계에 적용될 때 어떻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연구해왔다. 그는 이 책 역시 “철학서”라고 몇 차례에 걸쳐 강조한다. 워크를 분석하거나 사례를 나열해 비판하는 책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으며, 이 작업이 갖는 중요성에는 그도 십분 동의한다. 하지만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는 생각과 사상의 문제에 천착한다. 저자의 관심사는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좌파’로, 좌파가 오늘날까지 자주 내걸어왔으며 또 여전히 열망하는 철학적 이상에 관한 명확한 개요를 제시하는 것이다(34쪽).
니먼은 초판 출간 직후 홍보 차 유럽을 순회하던 중 호주 언론 〈퀼레트(Quillette)〉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집필이 “아주 시급하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밝힌다. 그간 좌파 진영의 많은 이들은 워크의 부상을 두고, 우파 진영의 공격 또는 음모론의 산물이라고만 여겨왔다. 그러나 니먼은 좌파의 시각에서 워크의 과도한 행태를 명확히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애초 좌파와 워크가 한데 묶이며 사람들에게 혼란을 낳는 이유 중 하나는 워크 또한 전통적으로 좌파의 것으로 여긴 감정들, 요컨대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과의 공감, 억압받는 이들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분노, 역사적으로 저질러진 잘못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굳은 결의 등에서 태어났다는 데 있다. 그러나 워크의 실천과 담론의 밑바탕에 자리한 “이론”이 모든 좌파적 입장에서 핵심이 되는 철학적 사상과 충돌한다는 데 중대한 문제가 있다. 부족주의가 아닌 보편주의의 지향, 정의와 권력의 확고한 구별, 진보의 가능성에 관한 강력한 믿음이 그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진보 좌파의 주류 담론 자리를 차지해버렸고, 이제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담론 지형에서 확산되고 있는 워크가 이렇듯 좌파의 기본 가치이자 최종 목표를 해체해버리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늘날 워크는 보편주의의 가능성, 정의, 진보에 대한 신념을 잃은 채 끝없는 분열과 경쟁의 먹이가 되고 있다. 니먼은 책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워크의 사유 방식을 떠받치고 있는 이론을 파헤치며, 워크식 탈식민주의가 좌파 혹은 리버럴이 견지해온 모든 원칙을 뿌리째 뽑아내 버렸음을 똑똑히 직시하도록 이끈다.
미셸 푸코는 어쩌다
워크 좌파의 대부가 되었는가
책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계몽주의로, 워크에 따르면 이는 유럽중심주의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와 동의어이다. 니먼은 이를 두고 “전혀 사실무근”인 데다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오히려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했다고 역설한다. 보편주의적 사상에 기초하여 식민주의에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75쪽). 그러나 미국 대학들에서 시작된 “계몽주의 때리기”로 인해, 계몽주의는 속절없이 세상 모든 원흉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워크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유산으로 내려온 인식론적 틀과 정치적 전제를 거부하는데,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이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형성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또 사상가들의 저작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모든 진보적 지식인이 그러하듯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저자는 매서우면서도 섬세한 눈과 손으로 장막에 가려져 있던 계몽주의의 지적 유산을 펼쳐 보인다. 루소, 디드로, 칸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투쟁이 기초로 삼았던 보편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97쪽). 또한 이들은 진보의 가능성을 착실하게 믿었고,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작업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198쪽). 니먼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대해 표준처럼 자리 잡은 독해 방식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폭로하는 데 공을 들여왔는데, 이는 그들이 오늘날 지배적 철학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진보, 정의, 연대의 개념을 제공하는 까닭이다.
한편 워크가 계몽주의 사상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에는 20세기 사상의 두 거장 푸코와 슈미트의 공이 크다고 저자는 혹독하게 지적한다. 책은 실로 다양한 저작물을 함께 살피며, 이들의 학문적 여정을 검토한다. 이들이 미친 악의적인 영향력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들의 사상은 근대 세계에서의 권력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정의와 권력 사이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진보에 대한 개념을 축소하고 훼손했다. 푸코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진보를 이루려는 많은 노력, 세상을 개선하기 위한 그 모든 노력이 종국에는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학교든, 집이든, 감옥이든, 다른 기관이든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훨씬 더 미묘한 형태의 지배와 통제라는 주장을 들으면, 억압 메커니즘에 맞서 싸우고자 무엇을 하건 우리 또한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진보에 대한 희망은 꺾이고, 결국 허상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치의 법 이론가였던 슈미트는 또 어떠한가? 그는 인간이라는 보편주의적 개념은 유대인이 비유대인 사회에서 권력을 얻으려는 특정 이익을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발명해낸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는 계몽주의가 내세우는 보편주의라는 것이 점점 비백인화되고 있는 세계에서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유럽의 특정 이익을 은폐하고 있다는 오늘날의 주장과 위험할 정도로 가깝다. 워크 안에 슈미트의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이 니먼의 주장이다.
포기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함께 더 많은 희망을 열망하기 위하여
애초 워크의 기원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블루스 가수 레드 벨리(Leadbelly)가 1938년 발표한 노래 〈스코츠보로 소년들(Scottsboro Boys)〉에서 “깨어 있으라(stay woke)”라는 구절로 처음 등장했다. 억울하게 강간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오랜 국제적 항의로 누명을 벗게 된 아홉 명의 흑인 소년에게 헌정된 노래였다. 이후 워크는 불의에 맞서 깨어 있고 차별의 여러 증후를 언제나 감시하자는 의미로 쓰여왔지만,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전성기를 맞으며 활활 불타올랐다. 오바마 집권기에 성년을 맞은 젊은이들에게 오바마 가족은 ‘당연한 규범’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들어선 트럼프 가족은 이들에게서 그 규범과 그것이 이끌던 모든 가능성과 기대를 빼앗았다. 이렇듯 낙담한 젊은이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워크 운동을 일으켰고, 시대에 뒤처질 것을 두려워하는 출판사와 대학교수와 대기업이 허둥지둥 이 운동에 올라탔다.
워크는 그 시작점은 주변화된 개인에 대한 관심과 염려였지만, 이제는 여러 정체성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하게 주변화된 부분에만 초점을 둔다. 그 결과 모두가 “트라우마의 숲”에 빠져 피해자의 자리를 선점하고자 한다. 워크는 부당한 피해와 상처를 바로잡아 회복하려 했지만, 권력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의의 개념은 옆으로 아예 밀어젖혔다. 워크는 스스로 저지른 범죄의 역사를 제대로 보라고 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든 역사는 범죄의 역사라고 결론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니먼은 워크가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공포스러운 것”이라 역설하고, 우파적일 수밖에 없는 일련의 이데올로기에 식민화 당한 상태인 워크 운동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파시즘의 모태라고 할 만한 세력들이 전 지구적으로 발호하여 도처에서 정치적 권리를 위협하고 있는 지금, 이들에 맞서 동맹체를 이루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러 정치적 권리를 보존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그 정치적 입장의 이름이 무엇이 되었건 모두 힘을 합쳐야 하는 때라는 것이다(248쪽). 따라서 진지한 민주주의자라면 누구나 찬성하고 뭉칠 수 있는 철학적 아이디어를 제시하고자 하는 게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지면에서 내내 부르짖은 진보, 정의, 보편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이 바로 그것이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책은 빼앗긴 ‘좌파’라는 단어를 되찾아 오기 위한 여정을 담고 있다. 재차 강조하건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는 철학서이다.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이 모든 혼동과 뒤엉킴은 철학을 통해 풀어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치적 실천도 강화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이 책은 태어났다. 철학의 쓸모는 아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지 발견하고 다른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더 크게 확장하는 데 있다. 책은 독자들을 바로 그 발견과 확장의 순간으로 이끈다. 지구 전역에 걸쳐 분노의 함성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 선 땅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니먼은 절망으로 손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더 많은 희망을 열망할 의무가 있다고 목소리 높인다. 이 시대 가장 신중하고 원칙적인 좌파 사상가가 좌파의 미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책을 들고 링 위에 올라섰다. 간결하면서도 논쟁적이고 정열적이면서도 냉철하게 빛난다.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