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사로잡은 히틀러의 성공과 몰락
“나치즘 연구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귀중한 책.”_〈뉴욕타임스〉
“나치 시대와 히틀러에 대한 놀랍고도 유익한 시각을 열어준다.”_〈파이낸셜타임스〉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안다. 뭘 더 알아야 하나?” 한 저명한 유대인 지도자가 히틀러의 젊은 시절에 관한 영화 제작 계획을 발표했을 때 한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히틀러에게서 인간성을 발견하려는 시도라면 말이다. 그가 증오와 폭력, 전쟁과 인종 학살을 행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역사상 독재자들은 대중을 통제하고, 존경을 얻고, 권력을 과시하고, 자신을 기념하는 수단으로 예술을 활용해 왔다. 하지만 히틀러는 ‘미학’을 활용하고 자신의 통치를 문화적 차원에서 정당화했다. 그는 차원이 다른 독재자였다. 파괴와 인종 청소는 새로운 건설로 가기 위한 길이었다. 예술은 권력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궁극적으로는 권력이 지향해야 할 목적이었다. 그는 제3제국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문화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 책은 정치인이 아닌 예술가로서 히틀러의 기록을 모았다. 미적 이상을 구현하려는 뒤틀린 욕망이 어떻게 세계를 불행에 빠뜨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 등장한다. 예술이 독재자에게 어떻게 아우라를 씌울 수 있는지, 독재자가 예술에 심취했을 때 어디까지 파괴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독자들은 예술에 심취한 히틀러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겠지만, 비로소 역사적 비극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예술은 어떻게 파시즘의 무기가 되는가”
독재자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 문제적 저작
히틀러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그를 반유대주의와 학살, 전쟁과 파괴를 일으킨 정치적 인물로만 다루어 왔다. 히틀러 전기를 쓴 역사학자 이언 커쇼도 “정치 바깥에서 히틀러의 삶은 대체로 공허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인종주의만큼이나 예술에 관해서도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정치적 행위를 단순한 권력욕의 결과로 본다면 이 커다란 비극의 절반만 보는 셈이다.
이 문제적 책은 2002년 출간되었을 당시 「인디펜던트」로부터 그해 최고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됐다. “철저하게 새로운 해석”, “근본적인 재평가”, “지금까지 정치나 인물 전기 분야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참신한 시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컨템퍼러리 리뷰」는 “이제부터 우리는 히틀러에 관해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고 긍정적으로 논평했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울적한 기분이 든다”라면서도 나치즘에 관한 주요 연구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평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책이 유대인 저널과 백인 민족주의 커뮤니티인 스톰프런트에서 동시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미국의 전직 외교관이자 문화 역사가인 프레더릭 스팟츠가 쓴 이 책은 아돌프 히틀러의 예술가적 측면이 정치적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독창적으로 탐구한다. 20년 넘게 미국 외무부에 몸담으며 유럽 주요 도시에서 근무, 유럽 정치와 문화에 대해 폭넓은 연구를 해온 저자의 학문적 엄밀함과 필력이 빛을 발한다. 이 책에서 히틀러는 단순한 악의 아이콘이 아니라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정치가로 재조명된다. 그의 복잡한 성격과 정치적 행동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 책은 히틀러가 어떻게 대중을 선동하고, 나치즘을 문화적 운동으로 발전시켰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독자들은 예술과 정치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예술이 어떻게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예술,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도 나치즘의 연구를 심도 있게 해줄 것이다.
“파괴는 건설로 가는 길이었다”
유럽 재건의 꿈과 창조적 열망의 이중성
히틀러는 자신을 본질적으로 예술가로 여겼다. 젊은 시절 그는 화가를 꿈꾸었고, 빈 미술 아카데미에 두 번 지원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러한 실패는 그의 자아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로 인해 그는 예술가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경로를 찾게 되었다. 바로 정치였다. 그러나 정치에 입문한 후에도 히틀러는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독일과 유럽을 재건하겠다는 강렬한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건축, 회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자신의 비전을 펼쳤으며,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국민을 결집하고자 했다. 전쟁은 그러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과정이었다. 설령 그 전쟁이 유럽을 파괴하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더라도 말이다. 그에게 파괴는 건설로 가는 길이었다.
히틀러의 예술가적 면모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뉘른베르크 당대회를 비롯한 장대한 퍼포먼스와 상징적인 연출을 즐겼다. 그의 연설은 철저히 연출된 이벤트였으며, 이를 통해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밤 시간대의 조명을 활용한다거나, 빨강과 검정의 스바스티카 깃발로 연단을 장식하는 등,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대중의 감정을 조작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성공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퍼포먼스가 대중들에게 정치 참여 감각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그가 대중을 파괴적인 전쟁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이 책에서 히틀러의 예술가적 기질은 그의 인간적 면모보다는 그가 지닌 파괴적 힘과 창조적 열망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히틀러는 문화국가를 표방한 수많은 예술 정책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 결과는 비극적인 전쟁과 파괴일 뿐이었다. 이 책에 담긴 수많은 인용문과 풍부한 사진 자료들은 발터 베냐민이 이야기했던 ‘정치의 예술화’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예술과 정치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합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예다.
문화는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이자
권력이 추구하는 목적 그 자체였다
히틀러의 예술 정책의 핵심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모든 독일인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따르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제3제국의 예술 정책은 선전부 장관과 제국문화회의소 소장인 요제프 괴벨스에게 맡겼다. 괴벨스는 예술 작품을 철저히 검열하고, 나치 이념에 부합하는 작품만을 전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작품이란 철저하게 히틀러의 입맛에 맞아야 하는 것이었다. 정책들은 철저하게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실행되었다. 게다가 그 지시는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하인리히 호프만, 게르디 트루스트, 아르노 브레커, 벤노 폰 아렌트, 한스 포세 등 히틀러가 예술적 식견을 인정한 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히틀러는 건축 분야에서는 알베르트 슈페어와 헤르만 기슬러 같은 건축가를 통해 거대한 공공건물과 기념비적인 구조물을 설계하고 건설했다. 특히 제3제국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펴낸 바 있는 슈페어는 히틀러의 비전을 충실히 따르며, 베를린의 ‘게르마니아’ 프로젝트를 포함한 여러 상징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조각 분야에서 대표적인 사례는 아르노 브레커와 요제프 토락이다. 히틀러는 특히 브레커에게 대규모 작업실을 제공하고, 수많은 공공 조각 프로젝트를 맡겼다. 브레커는 이상적인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을 표현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음악에 있어서 히틀러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숭배자였다. 그는 바그너의 후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바그너의 음악은 히틀러에게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동시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통해 독일 민족의 영혼을 표현하고자 했다. 단순한 예술적 동경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자신의 이념을 확산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렇게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 이념을 홍보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당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오페라를 위한 축제를 지원했다. 그 밖에도 지크프리트 바그너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음악가들을 지원하며, 그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념을 확산시키고자 했다.
독일을 매혹시킨 딜레탕트
편협한 취향이 비극이 되기까지
독일을 ‘문화 국가’로 재건하고자 했던 히틀러는 모든 예술과 문화를 철저히 통제하려 했다. 특히 모더니즘 예술을 독일 문화의 타락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예술이 유대인의 영향 아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이 언론과 예술 평론을 통해 모더니즘을 확산시키고, 이를 통해 독일의 전통적인 가치를 훼손한다고 믿었다. 특히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모더니즘 예술을 구매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챙기며, 독일의 문화적 순수성을 해친다고 비난했다. 이는 예술계에서 유대인의 영향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큐비즘, 다다이즘, 표현주의 등을 ‘타락한 예술’로 간주하고 배격했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같은 화가들은 히틀러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작품이 제거되고 전시가 금지되었으며, 퇴폐미술전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1937년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에서는 650점 이상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이후 파괴되거나 판매 금지되었다. 전통적인 미학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유대인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이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이러한 탄압은 많은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나 망명하게 했다.
결국 제3제국의 문화국가 비전이란 히틀러 자신의 예술관을 독일 국민에게 강요한 것에 불과했다. 그 결과로 독일 예술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문화국가라는 비전을 내세운 히틀러가 정작 예술과 문화에서도 파괴를 가져왔던 셈이다. 게다가 반유대주의는 예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제3제국 정책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처럼 커다란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히틀러의 예술관과 문화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이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비극의 이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