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수연, 이화, 희원, 희재, 진희, 석화, 지연…
한국 소설 속 뜨거운 이름들을 호명하며
그들의 삶과 마음, 운명과 마주하는 시간
시작은 박완서이다. “문학은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인간으로서의 자기 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 문학을 읽는 우리는 그 안에서 시대를, 인간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건져낸다. 건져내고 함께 호흡한다. 선하게 아름답고 투명하게 또렷한 이야기. 그러나 오랜 시간 쓰이고 읽힌 수많은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어쩐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깊은 고뇌에 빠져 있을지라도 세상과 갈등하고 투쟁하여 언젠가는 위대하고 용감해질 사람들. 혹은 이미 위대하고 용감하거나. 그리고 그들은 남자였다. ‘여자’는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는가? 슬픔에 젖어 불행한 채였지,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모험을 떠날 수도 없었고, 성장에 필요한 성찰도 대립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의 욕망과 철학과 주장은 삶의 한 방식인데도 유난하고 멋모르고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정말 그러하였을까?
여기, 실패와 고투와 일어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 등장인물은 여자 주인공들이다. 이야기의 힘이 다해가는 지금도 굳건히 ‘소설의 힘’을 믿으며 한국 현대소설을 연구해온 오자은이 여자 주인공들의 여정을 좇으며, 자기 증명에 부단히도 애썼던 이름을 복원하려 시도한다. 책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지난 50년간 한국 땅이 여성을 어떻게 상상해왔는지 말한다. 박완서, 김향숙, 신경숙, 은희경, 서영은, 최은영 등 여러 세대에 속한 여성 작가들의 작품과 조해일, 이문열 두 남성 작가의 작품이 목록에 올랐다.
《여자 주인공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성장 서사는 어떻게 (불)가능했는지, 어떤 성공과 부여가 있었고 어떤 실패와 굴절이 있었는지 각 시대의 마음을 읽어내며 그 경로를 추적한다. 각각의 시간 속에서 시대와 조우하고 시대를 극복하며 끝내 살아남아 우리에게 온 여자 주인공들을 호명한다. 이경, 수연, 이화, 희원, 희재, 진희, 석화, 지연……. 이들은 단 한 명의 여자이기도 했고, 수많은 ‘나’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에 불행했고, 무엇을 욕망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꺾었고, 무엇이 그들을 아프게 했으며, 무엇이 그들을 일으켰을까?
장녀 성장 서사의 원형을 찾아
오자은은 해방 이후,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한국 소설의 가장 큰 서사적 특징 중 하나로 ‘자수성가 모티프’를 꼽는다. 김원일이건 이문열이건 당대 쟁쟁한 작가들의 소설에서 우리는 혼자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간 장남의 자수성가 이야기를 익숙하게 접해왔다.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청년이 낯선 고장을 방황하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일정한 해답을 찾은 뒤 서울로 돌아와 ‘정상적인’ 중산층 엘리트 남성으로서 성장하는 스토리. 당시 대중은 이렇듯 중년 남성의 신산했던 과거 성장담을, 전후 폐허 속에서 배곯던 가난을 극복하고 고도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루어낸 한국 사회의 자부심과 포개어 읽었다. 그 자부심은 곧 ‘나’의 자부심이었다. 오자은은 묻는다. 장남의 자수성가 이야기 말고, 장녀의 이야기는 없는가?
다시 박완서이다. 책의 출발점이자 전체 지면을 관통하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것이 “6.25 전쟁 경험을 관통한 세대와 그 세대가 1970~1980년대 한국식 압축적 경제개발 속에서 중산층으로 전이해가며 어떤 역동을 겪는지를 형상화한”(22쪽) 박완서 소설 속 여자 주인공들이다. 오자은은 한국 소설에서 찾아보기 드문 ‘여성 성장 서사’의 시작점을 박완서라 분석한다. 1장 ‘K-장녀의 존재론’은 1970년대 박완서의 《나목》을 바탕으로 최근 ‘K-장녀’로 불리는 한국 큰딸들의 성장 서사를 재구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성장 서사의 핵심은 자율성이 더 많이 허락된 남성적 주체의 모델이었기에, 이 틀에 여자 주인공을 그대로 편입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여성은 어떠한 강제 속에서 무엇보다 “여성이 될 것”을 요구받았고, 성장을 방해하는 강력한 장벽과 맞서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을 단념시키는 것과 대결하고 시대와 싸워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장이어야 했는데, 바로 그러한 서사를 박완서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후 한국 소설사에서 가장 걸출한 ‘장녀 성장 서사’의 탄생이다.
박완서, 김향숙, 은희경, 서영은 최은영 소설 속
불화하고 욕망하며 극복하고 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
1장이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나목》의 이경이 보여준 ‘K-장녀’식 성장법과 그 고투를 담아냈다면, 이어지는 장들은 1930년대 초반 생인 이경 세대 이후 여성들이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각각의 시간 속에서 또 어떤 다른 방식으로 운명과 마주하고 살아갔는지 보여준다. 2장에서는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을 통해 ‘여아 살해’라는 과거의 임신중절 이슈를 경유하여 남아선호의 세계에서 어떻게 딸들이 탈출했는가 확인한다. 3장에서는 대중소설인 《겨울여자》의 이화가 당대의 호스티스 담론을 전복하면서도 동시에 남성 대중의 환상에 어떻게 공모했는지 그 이중적 양상을 읽는다. 이렇듯 1970년대 세 편의 소설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핵심은 가부장적 전통이 강력하던 시기,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실패하고 또 일어서는가를 살피는 데 있다.
4장과 5장은 1980년대 소설을 다룬다. 4장은 이문열의 《레테의 연가》를 통해 ‘문학소녀 길들이기’라는 주제 아래, 80년대에 불어닥친 문화적 개방과 여성 인권 향상의 흐름을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보수의 논리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어떻게 여성을 순치하려 했으며 또 여성은 어떻게 그로부터 벗어났는지 짚는다. 5장에서는 김향숙의 단편들을 통해 남성 중심의 운동권 문화와는 또 다른 ‘중산층 가정의 데모하는 딸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중산층 가정의 정치성 차원에서 읽어낸다.
혼란의 시기였던 1990년대를 다룬 6장과 7장은 이 시기 가장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신경숙과 은희경, 두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노동자, 그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를 이야기하는 소설과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중산층 엘리트 전문직 여성을 그린 양극단의 소설을 배치했다. 6장은 신경숙의 《외딴방》을 1970년대 여공 수기와 여공 담론을 경유하면서 읽어내고, 한때 ‘문학 여공’이었던 1990년대의 소설가가 이들의 삶을 재현하는 데 어떠한 윤리적 딜레마를 겪는지 살핀다. 7장은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진희를 고유한 개인을 넘어서 1990년대라는 시대적 특이성을 기입한 상징적 인물로 간주하고, 진희의 냉소와 사소함에 대한 집착을 1980년대에 대항하는 시대적 정서로 의미화한다.
2000년대 소설 중에서는 결이 다른 두 작가, 서영은과 최은영의 작품을 분석한다. 8장은 서영은의 《그녀의 여자》를 읽으며 남성 중심 예술가소설의 오래된 전통을 전복하는 여성 예술가의 비타협과 급진성을 다루고, 9장을 장식한 최은영의 《밝은 밤》은 ‘무해함’ 열풍이 부는 2020년대적 마음의 근원을 ‘여성적 관계의 의미란 무엇인가’에서 찾는다. 《그녀의 여자》가 예외적 여성의 강렬한 파괴성을 보여준다면 《밝은 밤》은 평범하고 약한 여성들의 우정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반대편에 놓여 있지만, 두 작품 모두 여성과 여성의 만남을 통해 남성적 전통과 관계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불같이 반짝이고 뭉근히 타오르는
우리의 이야기, 계보, 어떤 연결에 관하여
1970년대를 시작으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중요한 작품을 두세 편씩 배치하였으나 “그 중요도는 반드시 문학적 ‘정전’의 의미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 시대의 전형성이나 정상성에 공모하면서도 거기에 저항하는 문제적 여성들의 경우에 이 책의 중요한 자리를 내주었”다. 공모와 저항 사이, 문제적 여성 인물들을 통해 여성소설사를 재구했다. 먼저 읽은 문학박사 정희진은 “다학제적 방법론을 통해 문화 연구의 지평을 넓힌, 단숨에 읽히는 이 책을 통해 한국 현대사와 한국 사회를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라 호응하며 출간을 반겼다.
《여자 주인공들》은 한국 현대소설의 계급, 젠더, 도시성에 대한 글을 쓰고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가 대중을 대상으로 발표한 첫 문학비평집이다. 기발표한 논문을 바탕으로, 한국 소설을 사랑하는 대중 독자라면 누구나 손에 들고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고쳐 쓰고 새로 쓴 결과물이다. 지면을 가로지르는 신중하게 면밀하면서도 뜨끈한 온기로 살아 숨 쉬는 비평을 따라가다 보면, 얼핏 없는 듯 보였지만 실은 영화롭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던 ‘목소리’들의 존재를 의식하고 어루만지는 읽기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목소리를 포개게 된다. 이경, 수연, 이화, 희원, 희재, 진희, 석화, 지연……. 그리고 이어질 우리의 이름들을 생각하게 된다. 오자은은 “가장 큰 결핍에서 가장 강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국 땅에서 여성의 자리는 오랜 시간 약자의 자리이자 결핍된 자리였다. 2024년 겨울, 소설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 여성의 삶과 마음, 운명이 걸어온 역사를 살피는 책이 우리에게 도착했다. 가장 강하고 뜨거운 자리에 선 이름들이 독자의 품속을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