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100주년 기념 한국어판
레닌의 기획으로부터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를 꿰뚫는
지젝의 전방위적, 전복적 사유의 결정판!
2017년은 러시아혁명 100년, 2018년은 마르크스가 태어난 지 200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날 마르크스는 월스트리트도 좋아한다. 마르크스를 쉽게 풀어낸 책은 종종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레닌은 어떤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여 현실에서 사회주의를 이루고자 한 레닌의 ‘실패한’ 기획을 다시 들여다본다고 하면 대개 돌아오는 오는 건 빈정거리는 조소일 뿐이다. 그러나 현대철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근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슬라보예 지젝은 오늘날 레닌이 반복되어야 함을, 레닌의 실패가 아니라 그의 유토피아적 불꽃이 열어젖힌 기회를 되짚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이 긴박했던 러시아혁명 당시 쓰인 레닌의 가장 뜨겁고 순결한 텍스트를 편집한 뒤에 그에 대한 해설을 남긴 것이다. 레닌에 대한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주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조건하의 정치역학, 현대철학, 정신분석학, 대중문화 등 전방위적 영역에서 레닌을 재발명하고자 한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레닌이 실제로 한 일과 그가 연 가능성의 영역을 구분한다는 뜻이다. 레닌이 실제로 한 일과 또 다른 수준, 즉 ‘레닌 내부에서 레닌 자신을 넘어선’ 것 사이의 긴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레닌이 한 일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지 못한 일, 그가 놓친 기회를 반복한다는 것이다.”(본문에서)
레닌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오늘날과 같은 자유 민주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레닌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뭐가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용인은 ‘단, 현재의 정치 질서 안에서’라는 조건을 달고 있다. 지젝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관용’ 혹은 ‘민주적 합의’ 안에서 벌어지는 환경, 인권, 동성애, 빈곤, 페미니즘, 테러리즘 등에 대한 연구와 운동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공고히 할 뿐이다.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반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라도 용인되며, 자본은 그런 운동을 흔쾌히 지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관용’은 진실을 기만하고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우리가 파국적 상황을 맞이하면서도 혁명의 기회를 포착하고 실행했던 레닌으로부터 배워야 할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우리가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레닌주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본문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사고 금지’ 안에서의 ‘자유주의적 관용’이 어떤 모습인지는 맥도널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인도에서 소의 기름으로 감자튀김을 조리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맥도널드는 즉각 사실을 시인하고 식물성 기름만 사용할 것을 약속한다. 문제는 곧바로 해결되고 힌두교인들은 다시 맥도널드에서 음식을 사먹는다. 이 사건에서 지젝은 다국적 기업의 생색내기를 지적한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타자를 ‘관용’적으로 ‘존중’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용적 태도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죽이는 힌두교 전통을 맞닥뜨리면 ‘불관용’으로 쉽게 바뀐다. 이때 무엇을 존중해야 할 것인지 구별하는 일은 철저히 유럽 중심적인 사고를 따르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지젝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에 입각한 세계 자본 질서의 숨은 함정을 발견한다. 자유주의적 관용은 ‘타자’가 ‘진짜 타자’가 아닌 경우에만 유지되며, 이러한 태도는 타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자유주의적 관용의 실체를 드러내보인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2017년 한국의 혁명, 그리고 레닌의 유산
무자비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대기업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할리우드의 ‘반자본주의적’인 영화들이 흥행하는 상황에서 ‘반자본주의’라는 기표는 그 전복적 자극을 상실했다. 혁명이 팔리고 좌파가 상품화 되는 시대다. 그러므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마법을 깨뜨리기 위한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사실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수 있다. 지젝은 여기에서 ‘레닌의 유산’을 본다. 그것은 오늘날의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에서 생산된 상품화된 반자본주의와는 반대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 시대에 레닌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지젝은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 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혁명 이후 무엇이 반복되어야 하고, 무엇이 반복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반복해야 할 것은 레닌의 실패가 아니라, 그가 하지 못한 일, 놓친 기회다.
시리즈 『파국과 혁명 사이에서』 소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파국과 혁명 사이에서 1 – 혁명의 기술에 관하여』에서 1917년 2월혁명과 10월혁명 사이에 쓴 레닌의 텍스트를 추려 모은 뒤, 『파국과 혁명 사이에서 2 – 레닌의 유산: 진리로 나아갈 권리』에서 21세기 레닌의 사유를 재창조해낸다. 러시아혁명의 가장 긴박한 순간에 쓴 레닌의 텍스트에 기반해 지젝은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과 아이디어로 레닌의 기획을 재사유하여, 레닌이 기획했으나 실행하지 못한 것, 사유했으나 실천하지 못한 것, 나아가 레닌이 미처 사유하지 못한 것, 다시 말해 레닌을 ‘파국’과 ‘혁명’ 사이에 놓인 우리 시대의 문제로 호명해낸다.
지젝은 레닌주의의 파산을 선언하는 지적 유행을 거슬러 레닌의 기획과 실천을 다시 사유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레닌을 단순 반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낡은 교조적 확실성을 가리키는, 노스텔지어에 젖은 이름”으로서의 레닌이 아니라, “낡은 좌표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 상황, 재앙에 가까운 그런 새로운 상황에 내던져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했던”, “그런 상황에서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만들어내야 했던 레닌”을 다시 건져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20세기 초 오랜 진보주의의 시대가 정치·이데올로기적으로 붕괴한 파국적 상황에서 혁명적 기획을 다시 만들어낸 레닌의 기획을, 현재의 세계적인 조건에서 반복하자는 것이다.
이 책은 Verso에서 출간한 Revolution at the Gates를 우리말로 옮겼다. Revolution at the Gates는 2002년 처음 출간되었으며, 2011년 The Essential Žižek 시리즈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2008년 교양인에서 출간된 『지젝이 만난 레닌』은 2002년판을, 2017년 생각의힘에서 펴낸 『파국과 혁명 사이에서 1 – 혁명의 기술에 관하여』와 『파국과 혁명 사이에서 2 – 레닌의 유산: 진리로 나아갈 권리』는 2011년판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