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남자가 무슨 페미니스트야?
최승범은 강릉 명륜고등학교의 국어 선생님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800여 명의 남학생들이 모여 생활하는 학교에서는 온갖 육두문자와 힘자랑이 오간다. 귀에는 ‘따먹다’라는 단어가 수시로 꽂힌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그냥요” “재미있잖아요” “세 보여서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일생을 통틀어 성욕이 가장 충만한 시기라더니 대뜸 “섹스!”를 외치는 학생들도 있다. 자연스러운 욕망임을 알지만 저자는 남학생들이 그런 방식으로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 안타깝다. 아직도 많은 학교에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처럼 여성을 성취의 보상으로 여기는 급훈이 걸려 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페미니즘이 남성의 삶과도 맞닿아 있으며 여성만큼이나 남성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는 데 있다. 최승범은 어딜 가도 군대 문화와 폭력, 음담패설이 빠지지 않는 남성 문화에, 만취하지 않고서는 진솔한 대화와 허심탄회한 관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의문을 가진다. 여성의 삶도 기구하다 여기지만 결국 저렇게 되고야 마는 남성의 삶도 이상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의문은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조금씩 풀린다.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최승범은 대학 시절, 페미니즘 학회에 나가던 후배의 말을 계기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왜 페미니즘을 공부해?” 후배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그 후로 최승범은 본격적인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공기처럼 들이마신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쉽지 않다. 그에게도 여성의 공포와 분노에 공감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나 같은 선량한 사람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다니, 구조적 문제에 눈 감고 여성의 호소에 귀 닫은 채 ‘나의 무고함’을 주장하느라 바빴던 적이 있었다는 얘기다. 밤늦게 우연히 만난 여성 지인에게 ‘이 밤에 아이는 누가 봐주고 있는지’를 물었다가 아차, 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자신이 얻었던 무형의 이득들, 특히 평온한 가정에서의 일상이 ‘여성’인 어머니에 대한 착취로 가능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시대와 구조 속에서 묵묵히 살아낸 어머니의 삶을 복기하며 가해자이자 공모자로 복무해온 자신과 아버지를 돌아보게 된다.
남자니까 잘 모를 수 있다. 이 정도면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는 게 아닌지, 남자라고 해서 좋은 것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군대에 2년을 묶이고 남자라고 툭하면 몸 쓰고 힘든 일은 도맡아서 다 했는데,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도 착실히 짊어질 것이며 나는 잠재적 범죄자도 아닌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2015년부터 다시금 불타오른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열풍을 바라보며 온갖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니 알아보자. 모르겠으니까 배워보자. 여성들이 대체 왜 저렇게까지 분노하고 매일을 시끄럽게 떠드는지를 말이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 구도에서 페미니즘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건 완전한 오해다. 최승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께 페미니스트가 되자. 잃을 것은 맨박스요, 얻을 것은 온 세계다.”
800명의 남학생과 함께 삶을 위한 페미니즘 수업!
최승범은 ‘남페미’로서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한다. 그것은 일상의 최전선에서 같은 남성들을 향해 발언하는 것이다. 그는 남학생들을 향해 조심스럽고 은근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성평등을 이야기한다. 동료 남교사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 또한 병행하면서.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프로불편러’로 상상한다. 강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 페미니즘 전파 의지를 불태우며 학교 곳곳에서 투쟁할 것 같다고 예상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매우 은근하게, 슬며시 얘기한다. 연애 시절 아내의 손을 잡고 싶어 마음을 졸였을 때만큼이나 남학생들에게 페미니즘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잡는 게 조심스럽다. 국어 교사인 내가 ‘여러분, 오늘은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해 알아볼까요?’라는 식으로 뜬금없이 던지는 경우는 결코 없다.”
_본문에서
그가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방식은 철저히 국어 교과서의 텍스트를 통해서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 생원이 친구 조 선달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하는 성 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에 대해 최승범은 학생들에게 묻는다. 성 서방네 처녀는 과연 그 성관계에 동의했을까?
《문학》 교과서에서는 이육사의 〈절정〉과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각각 ‘남성적 어조’와 ‘여성적 어조’로 설명한다. 단정적인 표현을 쓰고 명령형 말투를 쓰는 것은 ‘남성적 어조’, 부드럽고 차분하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담긴 것은 ‘여성적 어조’라는 설명이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있기 때문인지 학생들은 그러한 설명을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거 구려요.” 학생들이 말한다. 최승범과 학생들은 함께 묻는다. 이 용어는 적절한 걸까?
물론 저자의 마음처럼 모든 학생이 함께 고민하지는 않는다. ‘선생님이 지나치게 예민하다’며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욕으로 초토화되거나 “여자 편을 너무 많이 들어서 가끔 기분 나쁨”이라는 불평이 적힌 교원 평가가 날아오기도 한다. 최승범은 그런 학생들을 이해한다. 자신이 보고 들은 어머니의 삶과 달리 학생들이 주로 보고 겪은 여성은 늘 감시자, 통제자, 처벌자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여성혐오 천지의 사회문화 속에서 여성혐오를 여성혐오로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러니 학생들은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데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변화는 감지되고 있다. 국어 수업 시간, 교과서에서 ‘처녀’를 [+인간] [-남성] [-결혼]이라는 의미 자질로 설명하는 것에 “이거 성차별 아니에요?”라고 먼저 물어오는 학생이 생긴다. ‘결혼하면 집안일을 많이 돕겠다’는 친구의 말에 ‘돕는 게 아니라 같이하는 거’라고 말하는 학생이 생긴다. 교사가 새로운 시각과 다른 목소리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은 스스로가 깨치고 길을 터나갈 수 있다.
기왕 올 세상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하자
남자가 바뀌는 만큼 새날은 빨리 온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페미니즘은 더 많은 사람에게 보편 인권을 보장해온 역사의 물줄기에 올라타 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막거나 외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김치녀’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단속했던 여성들이 이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데, 남성들은 ‘한남충’이 되지 않기 위해 여전히 여성을 단속하려 든다.”
_본문에서
그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남성들이 변해야 새날은 더 빨리 온다는 것,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압할 시간에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 이 거대한 물결이 이상한 게 아니라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도태될 거라는 사실이다. 결국 최승범의 이야기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도태되지 말자는 계산적 권유임과 동시에 성평등한 사회에서 여성들과 함께 온 세계를 얻자는 순수한 요청이다.
변하는 학생들을 보며 그는 희망을 느낀다.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나 이제는 동지가 된 친구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남성이자 페미니스트 선생님으로서 800명의 남학생과 동료 교사들을 향해 발언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확인한다. 나에게 유리한 쪽보다 우리에게 유익한 쪽에 서기, 그 명료한 지향이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교육은 아닐까. 우리에게 유익한 쪽이 비단 여성들만이 발 디딘 세상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