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변화의 철학인가?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구 사상사 전반은 플라톤 철학의 재해석이라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의 철학은 전통 형이상학을 말하며 그 핵심은 정지의 존재론이다. 그렇다면 왜 변화의 철학이 필요한가?
과학의 탐구 대상을 언어로 기술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정지된 상태라고 가정해야 한다. 자연 현상이나 사물의 운동 상태를 그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에서는 수많은 스틸컷을 모아 움직이는 사물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이상화(idealization)라는 방법론이 사용된다. 이러한 생각은 진리가 있다면 정지 또는 불변이라고 보았던 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 배경을 같이 한다. 뉴턴의 역학을 포함한 근대 과학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상화의 방법론은 물리세계를 다루는 자연계에는 잘 맞지만 생명세계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생명 현상의 운동을 정지된 스틸컷의 집합으로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닐스 보어가 이야기했듯이 살아 있는 세포를 관찰하고자 하는 과학자는 세포를 채취해서 염색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결국 죽은 세포만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생명의 원리는 변화 가능성
부화기의 악어 알은 주변 온도에 따라 수컷이 될 수도 있고 암컷이 될 수도 있다. 유전자도 중요하지만 그 발현이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유전자를 알면 생명의 모든 정보를 수 있으리라는 기대하에 1990년대에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에 따르면 DNA의 일부만이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다른 유전자가 작동하도록 끄고 키는 할을 하는 조절유전자가 많다고 한다. 이것은 유전자가 미래에 어떻게 발현될지 결정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 몸의 세포가 외부의 이물질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 즉 자기와 비자기의 정체성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다. 먼저 자기가 비자기가 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안의 비자기를 공격하라는 신호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기존의 실체론적 존재론이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서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준다. 신경생리학자인 라마찬드란은 왼팔을 잃은 환자에게 안쪽에 거울이 달린 큰 통을 주어 오른팔을 넣게 한 후 환자가 절단되고 없는 왼팔에 느끼는 가려움을 오른팔을 긁음으로써 해소한 실험 결과를 얻었다. 이것은 신경세포는 변화하지 않지만 시냅스(신경 세포들 사이의 연결 부위)는 항상 변화한다는 시냅스 가소성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진화의 철학이 가져온 사상적 전환
1859년에 출간된 『종의 기원』은 하나의 생물학 이론을 넘어 인식론적 혁명이었다. 다윈은 변화하는 자연의 사물이나 양태를 마치 정지된 것처럼 간주하는 물리주의 방법론에서 벗어나 든 존재는 변화한다는 ‘변화의 철학’을 제시하였다. 이 책은 다양한 생명 현상을 이해하는데에 진화의 철학이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살펴본다. 도브잔스키가 이야기한 것처럼 “생물학에서 진화를 말하지 않고는 그 어느 것도 의미가 없다.”
사회생물학에서 생명의 존엄성까지
물리학이나 화학과 달리 생물학은 인간의 삶과 사회 그리고 문화에 대한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예를 들어 도덕의 기원과 마음의 원형, 진보가 무엇인지와 같은 문제를 윤리학이나 사회과학만이 아니라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책은 자연선택의 결과 현존하는 생물종 모두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는 입장과 함께 생명의 존엄성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한다.
생물학과 철학의 만남
이 책은 현대 생물학의 구체적 주제들을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생물종의 분류, 유기체 고유의 방법론, 진화론적 변화의 존재론, 후성유전학의 인식론적 전환, 진화론의 인과율, 신경과학의 가소성, 생물학적 자아 개념에서부터 인간의 도덕심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와 생물학 지식의 사회적 영향력을 다루고 있다. 생물철학은 결국 인간이 무엇이며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진다.
생물학이 철학과 만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생물학의 탐구 대상이 단순한 무기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운동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인간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객관과 주관 사이의 경계가 무엇인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생물학이 다루는 인간과 철학이 다루는 사유하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다른 주체일 수 없기 때문에 철학과 생물학은 만나게 된다. 생물학과 철학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를 자연주의 인간학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