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이란 무엇인가?
역학(疫學, epidmiology)만큼 사람들이 자주 접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단어는 드물다. 빈번하게 접하는 어떤 것이 몸에 좋거나 나쁘다는 뉴스는 역학 연구의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업재해나 환경 관련 소송에서도 역학 연구는 중요한 증거로 번번히 인용된다. 장기간 흡연으로 폐암에 걸렸다는 이유로 제기되곤 하는 폐암 환자들과 담배회사 간의 소송에서도 흡연과 폐암의 인과 관계에 대한 역학의 연구 결과가 치열한 공방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처럼 공중 보건이나 의료 현장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적, 법적 맥락에서 역학의 중요성은 점점 더 크게 인식되고 있다.
•역학이 관심을 갖는 질환 : 감염병(에볼라, 에이즈, 사스 등), 흡연, 비만, 사고나 손상 등
역학에 관한 최초의 포괄적인 철학적 논의
역학이 점점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학은 아직 그에 걸맞은 철학적 관심을 받지 못해왔다. 이 책『역학의 철학』은 역학에 관한 포괄적인 철학적 논의를 제시한 최초의 시도이며, 역학의 철학을 과학철학의 하위 분야로 개척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역학이라는 분야가 어떤 점에서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논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선 역학을 “인구집단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여러 집단을 비교하는 방식을 통해 인구집단 차원의 질병 및 건강 상태의 분포와 결정요인을 탐구하는 학문 분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첫째, 역학은 HIV 바이러스가 AIDS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처럼 질병의 분포와 함께 질병의 원인을 추적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인과는 개별 인과가 아닌 인구집단 수준에서 적용되는 인과이다. 이 인구집단 수준에서의 일반 인과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역학자들이 어떻게 인과를 발견해내는지와 같은 주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역학은 물리학이나 생물학과는 달리 포괄적인 이론이 없고, 실험도 흔치 않다. 따라서 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담론들이 역학에서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흡연을 하면 폐암 가능성이 20배 높아진다?
그렇다면 일반 인과의 이슈는 무엇인가? 결정론적 인과 주장과는 달리 역학에서의 인과 주장은 연관성의 강도를 인과성의 강도로 해석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즉 역학자들은 단순히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흡연으로 인한 폐암의 상대위험도가 대략 20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흡연에 노출된 집단에서 폐암이 20배 더 많이 발병한다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인과에 대한 주된 철학적 이론인 반사실적 접근과 확률적 접근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진단한 후, 대안적 접근 방법으로 설명(explanation)을 제시한다.
설명적 접근에 따르면, 인과 강도는 노출에 의해 설명되는 결과의 순 차이를 말한다. 가령 흡연으로 인한 폐암의 상대위험도가 대략 20이라고 할 때, 설명적 접근에 따르면 20의 상대위험도는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흡연 상태의 차이에 의해 설명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역학의 연구 결과를 현장이나 정책에 적용하려면?
역학 연구의 결과물을 임상 현장이나 보건정책에 적용하려면 어떤 기준을 충족시켜야 할까?
통상 우리는 그것이 최선의 증거에 의해 지지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저자는 최선의 증거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어떤 역학적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역학자들은 그 주장이 안정적인지,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반박될 여지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만일 그 결과가 안정적이지 않고 후속 연구에 의해 뒤집힐 우려가 있다면, 그에 기초한 어떤 의료적 개입이나 처지도 신뢰성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안정성(stability)은 좋은 역학적 주장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안정성이란 무엇이고 어떤 경우에 안정적 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통용되는 최선의 과학 지식에 비추어볼 때, 해당 연구의 주제에 대한 적절한 추가 연구가 수행되더라도 문제의 연구 결과가 반박되지 않을 경우 그 결과는 안정적이다.
법정에서의 쟁점을 역학적 증거가 입증할 수 있나?
역학 연구는 인구집단 차원의 인과 강도를 산출하기 때문에, 개별 환자가 특정한 위험에 노출된 탓에 질병을 앓게 되었다는 주장을 역학적 증거가 입증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되어 왔다.
실제로 역학적 증거는 집단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개별 환자가 연루된 법률적 맥락에서는 아무런 증거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런 회의적 태도가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역학적 증거가 인구집단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이라고 해서 그 개별 구성원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역학적 증거는 흡연이 인구집단에서 폐암의 원인임을 알려주며, 이를 근거로 금연을 권고하거나 실제로 금연하는 행위는 불합리하지 않다. 금연은 폐암을 피하는 완벽한 전략은 아니지만 상당히 합리적인 전략이다. 따라서 저자는 적절한 상황이 주어지면 역학적 증거가 개별 인과를 입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