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평등·풍요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현대의 기획은 위기에 처했다
인류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번영으로의 길을 열어젖혔다. 그 후로 수세기가 지난 오늘, 인류는 그 이상에 성큼 다가섰다. 자유·평등·풍요의 이상은 현실이 되었다. 신분제, 노예제 등 전 현대적 속박은 사라졌고, 맹목적인 복종을 강제하던 관념들도 이성과 과학 앞에서 뒷전으로 물러났다. 절대적 빈곤도 많은 나라에서 예외적인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이상은 여전히 요원하다. 선진국에서도 해고와 실업의 위험이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국가와 거대 기업의 육중한 장치는 원자화된 개인을 양산하고 있다. 여성, 이주자, 유색인, 육체노동자, 빈민 등 사회적 약소자에 대한 차별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비웃으며 확산되고 있다. 아프리카, 중동, 남아시아, 중남미 등에서는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최소한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성장과 쇠퇴를 반복해온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그 극복의 조건
현대사에서 자유·평등·풍요를 향한 인류의 행진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진행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성장과 쇠퇴의 순환 리듬과 대체로 일치한다.
19세기 말부터 성장의 동력을 상실한 유럽의 열강은 외부로 눈을 돌려 식민지 민중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이는 곧 유럽 열강들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변모하고, 결국 세계전쟁으로 폭발했다. 그 후 서구 문명은 파시즘과 나치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고, 세계는 종족학살(genocide)을 동반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그러나 2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역사의 반전이 나타났다. 눈부신 경제성장이 이어지면서, 인류는 다시 이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제국주의적 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민중도 독립을 쟁취하면서 뒤늦게 현대의 기획에 참여했다.
하지만 20세기 말부터 자본주의는 다시 성장의 동력을 상실했다. 인류의 전진도 조금씩 느려졌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상징하듯이, 자본주의의 대안을 자처하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몰락했다. 1980년대 초 신흥공업국의 외채위기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점차 주기가 단축되고 파괴력이 증폭되어, 마침내 2007년에 세계적 금융위기가 폭발했다. 묵시론 같은 대불황의 암울한 예상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주는 막연한 희망도 물거품처럼 꺼졌다. 이 같은 역사의 반전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1세기에도 한 세기 전과 같은 참혹한 역사가 다시 반복될까? 그때와 지금, 동일한 것과 달라진 것은 과연 무엇일까? 변화된 조건에서 인류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역사과학에서 조명하는 격랑의 ‘현대’
이 책은 ‘현대’라는 격랑의 시대를 과학적으로 조명한다. 저자는 아리기의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을 활용하면서도 그에 결여된 자본주의의 발전 리듬에 대한 분석을 결합시킨다. 이를 통해 신대륙의 발견, 종교전쟁, 시민혁명, 산업혁명, 두 차례의 세계전쟁, 1960년대의 황금기, 최근의 금융위기까지 이어져온 희망과 좌절, 번영과 몰락의 현대사를 명쾌한 이론적 틀로 분석한다. 저자는 그 이론적 틀을 ‘역사과학’이라고 부른다. 역사과학은 특정한 ‘사건’과 그것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사건 속에서 어떤 메커니즘을 발견하여 역사의 ‘방향’ 또는 ‘경향’을 설명한다. 가령 1980년대부터 미국 경제의 ‘금융화’를 초래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그 다음에 이 메커니즘이 정부 정책, 자본의 축적 전략, 금융 기업의 활동 등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설명한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된다. I부 ‘현대의 여명’은 서유럽에서 현대가 탄생하는 역사적 과정을 분석한다. 현대는 중세와 구별되는 인류사의 한 시대로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민주주의로 표현된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시민혁명의 결과, 현대에 고유한 사회 구조가 형성된다. 이를 배경으로 자유·평등·풍요의 이상을 향한 인류의 전진이 새롭게 시작된다. II부 ‘현대의 사회구조와 모순’은 현대의 정치적·경제적 사회구조의 특성과 모순,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사회 변동의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III부 ‘현대의 첫 번째 위기와 부활’과 IV부 ‘혼돈의 시대’는 II부에서 제시한 이론적 틀에 기초하여 18세기부터 지금까지 현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조명한다. 먼저 III부는 18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자본주의의 성장과 발전, 몰락과 부활의 역사를 분석한다. 전후 새로운 생명력을 되찾은 자본주의는 1970년대를 거치면서 다시 위기에 처한다. IV부 ‘혼돈의 시대’는 20세기 말부터 저성장의 시대에 진입하는 세계 경제의 모습을 조명한다. 세기말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세계화’, ‘금융화’, ‘신자유주의’다. 이들은 금융을 중심으로 서로 결합된다. 결론인 ‘현대의 경계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추구해온 현대 정치의 현주소와 함께 21세기 세계의 민중이 직면한 위험을 분석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