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을 함께했던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
한국전쟁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기습적으로 남한을 침략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미군의 한국전쟁 참전 여부조차 결정되지 않았을 때 금발의 미인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는 전쟁 지역 중심부로 들어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거리트 히긴스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종군기자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콩고내전, 베트남전쟁을 몸으로 뛰면서 긴박한 현장을 직접 취재했고, 수많은 특종과 현장감 넘치는 기사를 통해 전쟁의 고통과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특히 한국전쟁을 취재할 때는 전쟁 발발 이틀 만에 한국에 들어와 약 6개월 동안 한반도 전역을 종횡무진하며 전황을 보도했다. 대한민국 해병대를 상징하는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도 히긴스가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북한군 대대병력을 궤멸시킨 통영상륙작전을 보도하면서 남긴 “그들은 귀신도 잡을 수 있겠다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라고 쓴 기사에서 유래했다. 1951년에는 한국전쟁을 취재하고 쓴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으로 퓰리처상 국제 보도 부문에서 여성 최초로 수상을 했다.
《전쟁의 목격자Witness to war》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앙투아네트 메이Antoinette May가 마거리트의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마거리트 히긴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저자는 히긴스를 직접적으로 알고 있거나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친구, 동문, 직장 동료, 가족-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증언을 통해 그녀의 삶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자 했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는 마거리트 히긴스에 대한 가장 진솔하고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종군기자가 될 운명이었던 마거리트 히긴스,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는 없다
히긴스는 아일랜드 출신의 아버지와 프랑스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 대피소에서 만났는데, 마치 그녀가 종군기자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걸 예견하는 듯하다. 히긴스는 학창시절 학업 성적이 매우 우수했고, 경쟁심이 남달랐다. 또 빼어난 지성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에게 늘 주목받는 아이였다. 비록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히긴스의 어머니는 그녀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히긴스는 버클리 대학UC Berkeley과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수학했고, 스물두 살에 〈뉴욕 헤럴드 튜리뷴New York Herald-Tribune〉(이하 〈트리뷴〉)에서 본격적으로 기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트리뷴〉의 정식 기자가 된 마거리트 히긴스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스타들로 가득한 강좌에서도 그녀는 유독 두드러졌어요. 매기는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의 미인이었고, 미모만큼이나 빛나는 지성은 감춰지지 않았어요. 그녀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죠. 당시에 여성이 저널리즘에서 성공하려면 무척 굳세어야 했어요. 저널리즘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고, 본질적으로 남성 우월주의에 물든 업계였으니까요. 매기는 걷잡을 수 없는 야망을 추진력으로 삼아 강하게 밀어붙였어요.
_뉴욕으로, 74쪽
우리는 그녀에게 정말로 도전거리가 될 만한 임무를 맡기려고 애썼어요.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일화는 당시 뉴욕의 저명한 경찰국장이었던 루이스 밸런타인을 인터뷰하라는 과제였어요. 그녀에게는 그 사람이 언론인을 만나지 않고 결코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죠. 그 사람에게는 서면으로 질문지를 보냈어요. 매기만큼이나 고집 센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매기는 그를 인터뷰해서 돌아왔고, 그 기사는 내용이 너무 좋아서 판매되기까지 했어요.
_뉴욕으로, 75쪽
그토록 바랐던 전쟁터로!
히긴스를 슈퍼스타로 만든 한국전쟁 취재
“위험하지 않은 곳이라면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1944년, 마거리트 히긴스는 〈트리뷴〉의 런던 특파원으로 발령받으면서 종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트리뷴〉내부에서는 ‘여성 종군기자’를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히긴스는 비웃기라도 하듯 연이어 특종을 터뜨리면서 그러한 우려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보다 먼저 독일 국경을 가로질러 악명 높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최초로 진입했고, 그곳의 포로들을 해방시키는 공로를 세웠다. 그녀는 특종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강철 심장을 가진 기자였다.
마거리트는 가스실을 둘러보았고, 간수들이 희생자들을 억지로 그곳에 밀어 넣는 것을 실제로 본 생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마지막 며칠 동안 살해당한 수천 명에 이르는 재소자들의 딱딱하게 굳은 시체들도 보았다. 마거리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시체들이 트럭과 카트에서 쏟아져 나왔다. 또 다른 시체들이 모퉁이마다 혹은 건물에 기대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 이를 때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자세를 가릴 만한 옷가지도 없이 내팽개쳐졌다. 그 공포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봄밤에 내린 서리가 두들겨 맞거나 그게 아니면 죽을 때까지 고문당한 희생자들의 눈과 코에서 흘러내린 피와 노란 점액 방울까지 섬뜩한 종유석 모양으로 얼려 버렸다.”
-다하우 강제수용소 해방, 126쪽
마거리트 히긴스를 슈퍼스타로 만든 것은 한국전쟁 취재였다. 그녀는 한국전쟁을 취재한 300여 명의 종군기자 중 유일한 여성 기자였다. 사실 〈트리뷴〉이 처음부터 히긴스를 전쟁 특파원으로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히긴스가 독일에서 세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본사 경영진들은 그녀를 일본 도쿄 지부로 발령냈는데, 이는 일종의 좌천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려움 속에서도 특종을 찾아냈고,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총사령관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을 함께하며 그 상황을 전 세계에 보도했다.
한국은 그녀가 동경했던 베를린처럼 공산주의 세력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겨우 4시간 비행 거리에 실질적인 뉴스감이 있었다. 그녀는 이 나라에 대해 감을 잡으려고 선거 며칠 전에 한국에 도착하도록 스케줄을 짰다. 마거리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임의대로 분단되었던 독일처럼 기사가 될 잠재력이 있음을 즉시 알아챘다.
_전화위복, 203~204쪽
바로 앞의 다리는 꽉 막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수레를 밀거나 보따리에 싼 소지품을 이고 터벅터벅 걸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문 온갖 종류의 탈것에 빽빽이 올라타고 느릿느릿하게 이동했다. 마거리트가 탄 지프가 마침내 3차선으로 된 북쪽 진입로에 닿았을 때 거대한 불덩이가 앞쪽 하늘에서 환하게 빛을 발했다. “세상에! 다리가 무너지네!” 누군가 울부짖었다. “우린 갇혔어.” 이 폭발로 그 즉시 수천 명이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강에 빠져 익사했다. 커다란 트럭이 마거리트의 눈앞에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중에 마거리트는 놀랍게도 남한 군대가 서울이 아직 그들의 수중에 있는데도 다리를 날려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_한국전쟁을 취재하다, 212~213쪽
마거리트가 쓴 상륙 기사는 〈트리뷴〉의 1면에 실렸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인천에서 미합중국 해병대와 함께
중무장한 미합중국 해병대는 역사상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육해군 공동 상륙작전에서 오늘 해 질 녘 인천항 중심부의 3미터 높이 방파제를 넘어 급습했으며 1시간 만에 이 도시의 요충지 언덕 세 개를 장악했다.
나는 ‘레드비치’를 친 다섯 번째 강습 물결에 속해 있었는데, ‘레드비치’란 실은 수직으로 쌓은 거친 바위덩어리들이다. 첫 번째 강습 병력은 즉석에서 급조한, 꼭대기에 강철 후크를 단 상륙용 사다리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그곳을 넘어가야 했다. 함포와 비행기가 치명적이고 꾸준하게 포격을 퍼부었는데도 살아남은 북한군들은 해변 가까이에서 소형 화기와 박격포로 우리를 괴롭혔다. 심지어 그들은 내륙 쪽으로 방파제 뒤편에 흐르던 도랑을 기어오르려는 우리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_인천상륙작전, 263쪽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는 늘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녀는 전쟁을 쉽고 안전하게 취재하기 위해 군 장성이나 고위 장교들과 가깝게 지내려고 특별히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쟁 지역에서도 실제 전투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르면서 참전 군인들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그래서 히긴스의 기사에는 이등병에서부터 총사령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느끼는 전쟁에 관한 생각이 폭넓게 담겨 있다. 전쟁터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기자들이 쓰는 글과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다.
용기 있는 여성, 시대를 앞선 여성,
여성의 눈으로 기록하며 치른
두 개의 전쟁
한편 히긴스는 전쟁터에서 공산주의 진영 말고도 남성 기자들과 또 다른 전투를 치러야 했는데, 때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선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여성 종군기자의 평등한 접근이라는 명분을 발전시켰다. 히긴스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이유만으로 취재에서 배재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즉 자신이 최전선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종군기자로서 활동할 때 ‘여성’이라는 성별이 핸디캡이 된다는 점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최전선에서 얻은 격려는 도쿄의 고위 장성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공식적인 말은 전쟁이 남자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냥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라고. 아마도 역사상 처음으로, (전원 남성인) 언론인들은 군대 기득권과 의견이 일치했다. 마거리트의 용기와 모험심은 그들 일부의 이미지를 깎아 먹었다. 워커의 명령을 철회할 수 있는 사람이 총사령관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마거리트는 자기 문제를 맥아더 장군에게 직접 가져갔다. “한국에는 자네에게 맞는 설비가 없네.” 장군이 그녀에게 일러 주었다.
마거리트는 변소를 의미하는 완곡한 표현을 비웃었다. “한국에서 화장실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단어 선택이 나빴군 —여성용 설비 말일세.”
“전 독일의 전선에도 있어 봤습니다. 헤밍웨이 소설들에 나오는 모스부호 작성법을 가르쳐 줄 또 다른 전쟁은 필요 없어요.” 그녀가 그를 일깨워 줬다.
_두 개의 전쟁, 238쪽
《전쟁의 목격자》는 가장 위험한 곳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한 마거리트 히긴스의 삶을 기억하는 책이다. 하지만 히긴스에게는 ‘마릴린 먼로를 닮은 금발의 종군 여기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어 전설적인 기자로서의 성취보다는 ‘미모의 여기자’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위대한 종군기자를 넘어 ‘전쟁 감시자’, ‘평화 수호자’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부족하다. 이 책은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그녀가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